아리조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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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과 추위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나바호들은 수십명 때로는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아직도 잔설이 하얗게 깔린 산길을 지나 부족장과 함께 요새로 향했다. 얼마  안되어 투항해 온 나바호들은 캔비 요새와 윈게이트 요새를 가득 채웠다. 두 요새에는 모두  3천여 명의 나바호들이 벌거벗고 굶주린채  백인 병사들의 손길만 기다렸다. 이처럼 투항한 나바호가 요새를 가득 채우자 칼튼 장군은 이제 나바호와의 전쟁은 끝났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실제 10년 이상 계속된 나바호와의 전투로 쌍방 간에는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실제 1863년 한해 동안 백인 병사 측에서는 사병 14명이 전사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장교는 3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을 당하는 한편 나바호들은  301명이 사망하고 87명이 부상을 당하는 한편 703 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칼튼 장군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나바호들은 투항을 거부하고 더 깊은 바위틈으로 숨어었다가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면 백기를 들고 요새의 문을 두드렸다. 


하루가 다르게 캔비 요새와 윈게이트 요새에 굶주린 나바호 들이 몰려들자 이제 이들을 먹이고 벌거벗은 몸을 가려주어야하는 칼튼 장군의 고민도 그만큼 늘어났다. 작전 초기 나바호 투항자를 3천여 명으로 예상했던 칼튼 장군은 계속 투항자들이 늘어나자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1864년 2월20일 칼튼 장군은 우선 윈게이트 요새에 수용된 200 명의 나바호를 보급품 조달이 조금은 용이하고 값도 저렴한 리오 그란디 근방의 로스 파노스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200 명의 나바호를 이동시킨 날 한때 부유했던 나바호 부족장 델가디토는 680 명의 굶주린 부족들을 이끌고 투항해왔다.


'비상식량으로 가축을 확보하라'

칼튼 장군은 섬너 요새로 강제 이주되는 인디안들은 자급자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칼튼 장군은 도착하는 인디안들에게는  황무지를 활당하고 개간을 시켰다. 칼튼 장군은 또한 계속 밀려올 나바호 들을 대비하여 섬너 요새 사령관 왈렌(Henry Wallen) 소령에게 "현재 소모되는 급식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소 50일 치의 양식을  확보해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바호들이 몰고 오는 가축중 새끼가 딸린 가축을 제외하고 모두 사들여서 비상시 식량으로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나바호들의 투항이 계속되자 전 뉴 멕시코 일대에도 식량파동이 일어났다. 산타 페에서 발행하는 "뉴 멕시코" 라는 일간 신문은 "칼튼 장군은 현재 요새 두  곳에 3.500 명의 나바호를 수용하고 있다. 칼튼 장군은 이들에게 정부가 제공하는 옥수수, 밀 같은 양식을 제공한다. 앞으로 이같은 곡물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가격은 필연적으로 농민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인 농민들에게 옥수수나 콩같은 작물을 가능한 더많이 작파할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시장과 가격은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하기바란다"라고 당시의 심각한 식량난을 주민에게 알렸다.

칼튼은 먹이고 입혀야 할 나바호 긴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뉴 멕시코주 연방영토의 인디안 감독관을 역임한  콜린스(James L. Collins)를 수도 워싱턴에 있는 군무국장 토마스 (Lorenzo Thomas) 장군에게 보냈다. 칼튼 장군은 콜린스를 통해 "당장 6천개에 달하는 입과 몸뚱이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많은 입을 먹이려면 장차  2백만 파운드의 곡물이 필요합니다"고 말하고 "보스크 레돈도에서 햇곡식이 나올 때까지 지원해주십사"하고 읍소했다.


2백만 파운드의 식량지원을 요청

칼튼은 콜린스 특사를 통해 "2백만 파운드의 곡물은 4차례에 걸쳐 지원하되 우선 50만 파운드는 당장 필요하고 2차분 50만 파운드는 8월까지 그리고 3차분은 11월 달, 나머지 4차 분은 씨앗을  파종할 봄철에 지원해준다면 보스크 레돈도의 나바호들은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칼튼 장군은 또한 "이들 나바호들이 우리에게 바친 너른 초원과 광대한 땅에 뭍혀있는 엄청난 황금을 생각한다면   당장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들어가는 돈은 푼돈 정도"라는 논리로 토마스 장군을 설득했다.

보스크 레돈도에 나바호들을 강제수용할 섬너 요새안의 나바호 보호구역은  1864년 1월15일 당시 내무장관 우셔(J.P. Usher)가 링컨 대통령에게 상신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연방정부는 소수 인디안들을 지원할 만큼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 칼튼 장군은 스스로 이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콜린스의 읍소와 엄청난 황금이 매장된 고향 땅을 백인에게 양보한 선한 나바호들을 위해 토마스 장군은 200만 파운드의 곡물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우선 일차분 50만파운드의 곡물은 콜로라도 지역사령부의 병참기지를 통해 지원하고 나머지 곡물은 차례로 콜로라도 강 근방 유마 요새를 통해  지원하기로 했다. 그외에 토마스 장군은 착한 나바호들을 위해 10월 경 3천두의 소를 섬너 요새로 보내겠다고 하여 일단 칼튼 장군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병사들의 식사량을 반으로 줄여

콜린스 특사로 부터 고무적인 소식을 접한지 채 2주가 되지못한 3월경 투항해온 나바호는 모두 6천을 넘었다. 이처럼 많은 입을 당장 감당할 수 없는 칼튼 장군은 1864년 3월25일 특별명령을 통해 자신이 지휘하는 뉴 멕시코 주둔군의 전병사들에게 하루 배식되는 정량을 반으로 줄이고 정확한 소요량을 파악하기 위해 부대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민간인 세탁부, 사환 등 민간보조원도 정학히  그 수를 파악하여 대처하도록 지시했다. 칼튼은 요새사령관 등 지휘관들에게 다시 한 번 허리띠를 바짝 동여매고 절약할 것을 강조했다. 모든 병사들의 식사 량이 반으로 줄어들자 나바호들에게는 더 적은 양의 식사가 제공되었다.

칼튼의 엄명을 받은 섬너 요새의 왈렌 사령관은 나바호 1명 당 밀가루나 옥수수, 밀 등 곡물은 하루 1파운드씩 배급하고 쌀이나 콩, 또는 완두콩, 마른 과일같은 식품은 반 파운드씩 배급하면서 절약에 절약을 거듭했다.

칼튼은 1863년 9월 425 명의 메스칼레오 아파치를 보스크 레돈도로 이주시키면서 언어의 뿌리가 같아 사촌격인 나바호 51명을 함께 보냈다. 이들 51명의 나바호는 일찌기 백인들의 통역을 지냈고 백인들에게 협조적이었던 세보레타 근방의 아파치들 사이에서 살던 부족장 산도발이 이끄는 부족들이었다. 칼튼 장군은  이들 두 부족이 화목하게 산다면 두 부족을 동시에 문명인으로 개조시킬수 있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었다. 칼튼 장군은 이들을 함께 이주시키면서 특별히 요새사령관에게 당부하여 나바호들에게는 별도의 몫으로 개간할 땅을 활당하여 숫자가 많은 아파치들과 불화가 없도록 돌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두 부족은 끝내 화목하지 못했다.

1863년말 섬너 요새의 병사들은 서둘러 나바호들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우선 넓은 방 5개가 딸린 대형 흙벽돌 건물 5채를 완공하고 그 옆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흙벽돌 건물 6채를 연이어 지었다. 또한 24 병상을 갖춘 병원과 제빵실 그리고 방 3개가 있는 경비실도 마련했다. 또한 가로 175피트 세로 36피트 규모의 보급창고와 각각 100 마리의 말을 맬 수 있는 마굿간 3채도  완성했다. 


페코스강 물 끌어들여 황무지 개간

일차로 섬너 요새에 발을 디딘 아파치 425명과 51명의  나바호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양식을 마련할 개간작업에 투입되었다. 아파치들은 요새 한편에 배정된 황무지에 페코스 강물을 끌어 들이기위해 근 10마일에 달하는 수로작업에 매달렸다. 51명의 나바호들도 아파치들과 거리를 두고 배정받은 메마른 땅에 곡식을 파종하고 가꾸었다.

1864년 2월 많은 나바호들이 요새로 향하자 칼튼 장군은 서둘러 개간작업에 나섰다. 칼튼 장군은 쟁기,삽, 곡괭이같은 농기구와 파종할 씨앗을 확보하기 위해 사방에 편지를 띄우거나 관계자들을 보냈다. 벌써 파종할 시기는 목전에 와있었다.

나바호들이 섬너 요새에 도착할 무렵 쟁기날 8개가 달린 대형 쟁기 2대가 콜로라도에서 제작되어 섬너 요새에 도착했다. 또한 유니온 요새에서는 대형 쟁기 2대가 별도로 제작 중 이라고 했다.  칼튼 장군은 우선 페코스 강물을 끌어들일 관개수로공사의 책임자로 요새안  에서 농사에 경험과 식견이 많은 캘로웨이(William Callaway)대위를 임명하고 공사에 속도를 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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