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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환 목사 기독칼럼] 한국교회 형성 이야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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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민족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대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고의 선(the supreme good)일 수는 없다. 

국가나 민족은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영혼구원과 변혁의 대상이며 동시에 생존과 문화적 보존의 통로일 뿐이다. 

이것은 초월적 하나님을 믿는 기독신자의 정체가 세상과 관련하여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910년대를 살아가던 민족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일제의 대한 식민주의적 강점과정에 대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을 잣대로 한 적극 항일운동 부류, 대다수의 무관심 부류, 그리고 피안적 영성세계만을 추구하는 부류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그 당대 일제가 파악한 한민족 교인에  대한 성향분석이기도 한데 그래서 일제는  은밀하고도 단계적으로 항일운동 부류에 대한 탄압을 진행시켰다.


1905년에서 한일합방시인 1910년대까지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한국 기독교나 재한 서양 선교사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였다. 

그 이유는 일제의 한국 강점이 일제의 독자적 힘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그 당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했던 서양 제국주의의 해양세력의 묵시적 동조와 협력이 있었음을 잘 인지하고 있음에서 이다. 

하지만 일제는 그 당대 그들의 대한 식민주의 통치에  가장 부담스럽고 위험스런 세력이 기독교세력인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5년부터 은밀하게 기독교에 대한 탄압공작을 진행시켜왔다. 

그래서 일제는 1905년부터 ‘조선인의 일본화’라는 정책기조에서 교육방침을 정하여 추진해 왔고 한국 민족계열의 학교들, 특히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을 ‘비문명적 교육기관’, 다시 말하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반대하고 체제를 무너뜨릴 위험한 대상으로 지목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그 당대 전국에 20여만명의 학생수로 집계된 5천여 사립학교를 절반으로 줄이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여기서 제거된 거의 대부분의 학교는 바로 기독교계 학교들이었다.


더 나아가 1910년대 이후 일제는 민족 기독교회와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노골적으로 노출하기 시작하는데 그 요인은 1910년대 한일합방 전후 일어난 항일 테러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으로 들어난 점과 데라우찌 총독의 무단 강경통치에 기인한다.  

여기서 우리는 1910년대 전후 기독교적 정신을 가지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한 흐름에 대해서 잠깐 살펴볼 것인데 이 항일운동 흐름은 무장 투쟁운동, 항일 경제운동 그리고 해외에서의 민족 독립운동으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당대 기독교인이면서 항일 무장 투쟁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전개한 대표적인 인사들로는 안중근 이재명 장인환 안명근 이동휘 등을 들 수 있다. 

독실한 기독신자였던 장인환은 전명운과 함께 1908년 당시 미국인이면서 친일파였던 D.W.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를 들렀을 때 권총으로 저격하여 결국 스티븐스는 죽고 장인환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재미 한인독립운동 회원들과 미국언론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한국민의 독립의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고 이 일로 미주지역에서 한인 독립운동이 한 체계로 통합 결성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 항일운동 조직에 큰 격려가 되어 1909년 천주교 신자 안중근은 개신교신자 우연준과 더불어 초대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의 저격을 하르빈에서 결행할 것을 결안하고 성공하게 되는데 이 일에 가담했던 우연준은 상동교회에서 민족운동과 신앙을 전수받았던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안중근의 저격사건에 대담하게 공조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내에서는 이재명이 매국노 이완용을 저격하려고 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는 1905년 안창호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2년간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약하다가 1907년 귀국하여 이와 같은 대담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기독신자였다.   

그 당대 이와 같은 개별적 항일 무장 투쟁운동은 더욱 발전하여 1910년대 이후 대부분의 독립운동 지사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미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전개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이런 해외 민족 독립운동은 또한 국내에서 계속해서 교회와 기독교학교를 통하여 지속된 민족 독립운동과 결부되어 결국 1919년 3.1만세 독립운동으로 분출될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시대 민족교회는 민족을 사랑하였고 민족 독립운동의 요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