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김 원장 라이프칼럼] 아프니까 청춘이다

1967년 1월, 함박눈이 훨훨 날리는 창밖을 힘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 나. 윤경이가 그리워 말할 기운도 없이 목화송이처럼 수북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흥건하게 젖은 눈으로 가슴을 적시고 있다. 저 눈송이들 속에 윤경이가 보이는 듯 하다. 평생을 함께 재미나게 지내자더니 휘날리는 눈바람 속에 지금처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병원 침대에서 나의 손을 꼭 잡은 채 미소로 영원히 잠들었다.
윤경이가 이 세상에 있다면 벌써 전화가 따르릉 울렸을 것이다. “오늘은 오후 5시30분에 명동 가화다방에서 만나자.” 우리 사이는 “오늘 만날 수 있어?” 이런 대화가 아니었다. “만나자” 하면 열일 제쳐 놓고라도 만나는 사이. 눈 내리는 날이면 영락없이 제일 먼저 전화오는 윤경이었다. 윤경이가 나였고 내가 윤경이었다. 항상 만나면 마음을 서로에게 다 주는 친구. 둘이 다 문학과 음악을 좋아해서일까, 책을 읽은 후의 작품 이야기, 음악 이야기로 둘을 묶어 놓았다.
잡지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윤경이는 깔끔하고, 예리하고, 철저했다. 잘 웃기는 약사인 화자와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초등학교 친구 경은이도 늘 함께 하였다.
결혼하면 지금처럼 자주 만나지도 못 할 터이니 마음만은 변치말자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우리 네 명을 기념하는 클럽 이름을 네잎클로버라고 했다. 흔하게 발견할 수 없는 네잎클로버 이기에 우리는 특별하다고 자화자찬도 했었지.
윤경이가 결혼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넷중에서 첫번째의 결혼이니 축하해 주자고 한없이 떠들었지.
저렇게 철저한 애가 결혼생활을 제대로 해 나갈까? 윤경이는 마음도 행동도 순수 그 자체의 친구였다. 몸이 약해도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던 윤경이는 결혼 전에 문학인으로서의 인정을 먼저 받고 싶어했다. 화자가 “문학보다, 우리 보다, 결혼이 더 좋아졌어?” 시무룩했던 우리를 웃겼다. 신문사의 기자와 결혼한 윤경이를 첫 아기의 백일잔치, 돌잔치 때 보고는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화에서 저녁에 보자.” 앞뒷말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예감이 이상했다.
차 한잔 시켜놓고 대뜸하는 말이 “나 결혼 생활이 싫어졌어.” “이게 뭐야,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을 이해는 하지만 이건 아니야. 그 좋아하는 책은 어디에 두고 사는지도 몰라. 하루종일 하는 일이 집안 청소, 시어머님 때문에 세끼 상차림, 애기 돌보기, 빨래, 다림질, 너 같으면 하겠어? 결혼생활 그만 두어야겠어. 이렇게 사는건 아니야.” “윤경아 가만, 천천히 생각하자. 네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 충분히 이해해, 남편에게 먼저 말 꺼내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더 생각하자.”
겨우 달래서 윤경이를 먼저 보내 놓고 미도파 앞 버스정류장까지 걸으면서 생각에 빠졌다. 윤경이가 불행해서는 안돼. 정말 안돼. 만날 때마다 방황하는 얼굴의 윤경이는 얼굴 색도 안 좋아졌다. 웃음도 없어지고 점점 여위어 갔다. 저렇게까지 힘들어 하니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결혼한 여자에게 다니던 직장을 다시 찾아간다는 것은 6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당시의 사회에서는 꿈 같은 일이었다. 특별한 해답도 없이 어느새 6개월이 흘렀다. 윤경이가 우리 모두를 만나자고 했다.
설마 이런 청천벽력 같은 말을 준비하고 나온 것은 아니겠지. 백혈병 진단이 나왔다고 아무런 억양도 없이 털어 놓는다. 시한부 인생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우리 셋은 모두 말을 잃고 말았다. 눈물만 고인 채 서로를 껴안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김난도 작가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최근에 나왔다. 그 말 조차도 호사스럽게 들릴 수 있었던 암담했던 그 시대. 지성과 감성이 풍부했던 친구 윤경이는 자기의 아픔을 호소조차 못하고 갔다.
윤경, 너만한 친구 아직 못 만나 외로움에 떨면서 너를 가슴에 안고 산다. 그 어렵고 어두운 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우리의 젊음은 그렇게 살아져 갔다.
7. 11.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