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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루즈벨트 댐 '태양의 계곡'에 번영을 가져오다(3)-정부 융자금 재상환 위해 회원 토지를 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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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4월6, 7일 이틀 동안 벌어진 실로 (Shiloh) 전투에서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 66,812 병사 중 1,754명이 전사하고 파웰을 포함한 8,408명의 병사가 부상당했다. 존스턴 장군이 지휘하는 44,899명의 남군 병사도 1,788명이 전사하고 8,012명이 부상당했다. 남군은 이 전투에서 사령관 존스턴 장군이 전사하고  북군의 남부 진격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오른 팔을 절단한 채 복무하다 종전과 함께 소령으로 예편한 외팔이 소령 파웰은 옛집으로 돌아가 다시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1868년 여름, 정부로 부터 서부 탐험비용을 지원받은 파웰은 당시만 해도 백인들에게는 완전 미지의 세계인 서부 대장정에 나선다. 파웰은 부인 엠마 딘 (Emma Dean)을 포함한 10명의 탐험대원과 함께 콜로라도의 로키 마운튼에 있는 롱 피크 Long Peak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장대한 콜로라도 강을 바라보면서 이 강을 탐험할  꿈을 키운다.


황토빛깔의 장대한 콜로라도 강물이 웅장한 그랜드 캐년의 협곡을 휘돌아  흐르는 동안 수많은 인디언들은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올랐다. 스페인 사제들도 어렵사리 격류를 타고 강을 건너 원주민 마을을 찾아가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 또한 털투성이 사냥꾼들은 노새를 타고 무섭게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버리고 온 고향을 꿈꾸듯 눈길을 던졌을 콜로라도 강. 그러나 누구도 자신들이 지나고 바라 본 콜로라도 강과 밟고 온 땅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파웰은 달랐다.


외팔만으로 콜로라도 강을 탐험


1869년 5월24일 파웰과 8명의 탐험대원은 파웰의 부인 엠마 딘의 이름을 따라 “엠마 딘” 이라 부르는 단단한 보우트에 성조기를 꽂고 와이오밍의 그린 리버에 배를 띄웠다. 급물살을 타고 엠마 딘은 와이오밍과 유타를 지났다. 강물은 작은 폭포가 되어 엠마 딘을 사정없이 내려칠때마다 엠마 딘은 하늘로 솟구치고 강물 속으로 잠겼다. 이렇게  콜로라도 강을 굽이굽이 돌아 엠마 딘은 3개월 만에 아리조나로 빠져들었다.

파웰은 각기 다른 탐험대원들과 함께 두 차례나 콜로라도와 그랜드 캐년을 탐험했다. 파웰은 탐험 도중 추위와 더위, 허기와 무섭게 몰려드는 공포에  맞서야했다. 언젠가는 급물살에 엠마 딘이 뒤집혔다. 소중한 양식도 모두 물에 잠기고 대원들은 물살에 모두 떠내려갔다. 그러나 얼마 후 파웰은 강 연안에 올라 죽었다고 생각했던 동료를 껴안고 서로 기쁨의 환성을 올렸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대원 3명은 바위를 타고 협곡을 벗어났다가 인디안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했다.


인디안에 죽임을 당한 탐험대원 


파웰도 몇차례 죽음과 직면했다. 협곡을 기어오르다 오도가도 못한 그를 동료 대원이 바지를 찢어 만든  밧줄을 몸에 감아 끌어 올려 목숨을 구했다. 그는 철사줄처럼 뻗은 질긴 수염을 콜로라도 강물을 스치고 불어온 바람에 날리면서 보우트에 온 몸을 묶은채  왼팔만으로 그 험한 역경을 이겨냈다. 그리고 그는 “미국 건조한 지역의 토지”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 보고서를 통해 “연방정부가 황무지 개발에 앞장 선다면 낙후된 지역에 주민이 몰려들고 농축업등 산업이 발달하여 주 전체가 번영을 이룰 것”이라고 주장하고 정부가 건조한 서부의 황무지 개발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이후 루즈벨트 댐과 저수지로 결실을 보게된다.


파웰은 콜로라도 강 대장정 중 아직 개발하지 못한 대서부 산야에는 겨울에 쌓였던 눈이 봄비와 함께 녹아 강물에 흘러들어 엄청난 홍수를 이루어 그 귀한 물이 헛되이 흘러가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온 벌판은 농작물을 가꿀 수가 없는 황무지로 영원히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파웰은 홍수로 흘러버리는 강물을 저장하여 홍수를 예방하고 운하를 통해 농경지를 개발한다면 정착민들이 몰려들어 낙후된 서부도 번영을 이룰 것이라고 확신했다.


외팔이 파웰의 주장은 드디어 결실을 보게되었다. 와이오밍 주 상원의원 와렌 (Francis E. Warren)과 네바다 주 연방하원의원 뉴랜드 (Francis G. Newlands)가 앞장 서고 이후 공유수면매립 및 개간 간척 사업법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맥스웰 (H. Maxwell)과 아리조나 연방영토의 솔트 강유역용수자협회 초대회장이된 파울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1902년 6월17일 황무지를 개발할 수 있는 공유수면매립 및 개간간척사업법이 의회에서 제정되어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 의해  공포되었다.


이 법은 연방정부가 보유중인 토지를 매각한 돈이나  개발예정지의 토지를 공유수면매립청(이 기사에서는 공유수면 매립청이라고부른다.)에 유보한 후 이 돈으로 댐이나 저수지를 건설하고 이후 실수요자로 하여금 공사비인 국고를 재상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법안이 공포되자 아리조나 주민들은 사기업을 통해 저수지를 건설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공유수면매립청과 협조하여 톤토크릭분지에 댐과 저수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우선 아리조나 주민들은 용수를 공급하고 전력을 생산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솔트강 유역용수자협회를 구성하고 초대 회장에 파울러를, 그리고 부회장에는 윌버 (Ethelbert W. Wilber)를 선임했다. 그리고 협회의 사업계획과 정관은 키비 (Joseph  H. Kibbey) 판사가 작성하기로 했다. 키비 판사는 이후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아리조나연방영토 주지사를 역임한다.


황무지 개발에 정부지원을 촉구


이 용수자 협회에 가입한 농장이나 목장의 토지소유자는 매립청의 국고 융자금을 재상환을 조건으로 근저당 설정에 서명했다. 협회 창설 5개월만에 서명한 토지는 무려 14만 2천 에이커에 달했으나 이후 23만 8천에이커로 늘어났다. 또한 이 협회는 저당된 토지의 1에이커당 액면가 15달러의 주식을 1주씩 모두 25만주 3백7십5만달러어치의 주식을 발행했다. 그리고 누구도 160주 이상은 소유하지 못하도록했다. 키비 판사가 작성한 협회의 정관과 사업계획은 1903년 2월7일 4시 15분 마리코파 카운티의 등기소에 정식으로 접수되었다. 

한편 협회는 자문위원으로 지역 사업가인 챈들러 (A.J Chandler)와 루소 (L.D Rouseau), 그리고 허얼리 (Patrick T. Hurley) 등을 선임했다. 미연방 정부의 내무성 히치코크 (Ethan A. Hitchock) 장관은 아리조나의 용수자 협회가 제출한 사업계획을 승인했다. 이로써 솔트 리버 프로젝트 (Solt River Project) 즉 S R P는 공유수면 매립청의 첫사업으로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협회의 사업설명회는 피닉스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렸다. 템피의 회원들은 왕복 기차표를 35센트에, 메사의 회원은 50센트에 구입한 후 기차를 타고 설명회장에 모여들었다. 


루즈베르 댐과 저수지 공사에 필요한 모든 간접시설을 마친 후 댐과 저수지 공사는 1906년 9월20일부터 매립청에서 파견나온 힐 (Louis C. Hill) 기사와 존 M 루크 (John M.. Rouke) 토목회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피츠버어그에서 이태리 출신 석공이 오고 멕시코와 흑인 노동자들은 텍사스에서, 그리고 근처 아파치들이 망치와 삽을 들고 톤토 크맄에 몰려들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6톤짜리 바위덩어리가 댐이 들어설 맨 밑바닥에 자리잡자 미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이제 ‘태양의 계곡’ 솔트 강 유역은 찬란한 새 역사의 지평선으로 들어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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