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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해고한 낙타 몰이꾼 고향으로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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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주둔 사령관 트위그 소장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낙타가 싫었다. 껑중한 키에 긴 목, 그리고 슬퍼보이는 눈조차 싫었다. 이제는 싫은 게 아니라 미웠다. 이러한 낙타들이  자신의 부대 속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트위그 소장은 병참감 제섭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선 낙타는 우리 병사들이 다루기에는 덩치가 너무 크고 또한 병사들은 낙타보다는 노새에 익숙하다. 본인은 낙타 5마리와 노새 1 마리를 바꿀 수가 없다”고했다. 또한 트위그 장군은 “어떻게 낙타가 600 파운드를 지고 하루 종일 무사히 걸을 수가 있는가. 나의 휘하에 있는 노새 1,920 마리는 100-200 파운드를 지고도 등에 난 상처가 아무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찌됐든 트위그 장군은 자신의 휘하에 “낙타는 있을 수 없었다.” 


“낙타 5마리와 노새 1마리 바꿀 수 없어”

트위그 장군은 낙타를 몰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빠듯한 부대의 예산 문제를 들고 나왔다. 군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데 사회에 별다른 공헌도 하지않는 40내지 50마리의 낙타에게 매월 395달러를 지출한다는 것은 세금 낭비라고 주장했다.

마침 트위그 장군에게 낙타를 떨쳐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국방성은 텍사스 남서부 빅 벤드(Big Bend)지역을 탐험 하는 지질조사대에 낙타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트위그는 자신의 부대에서 낙타를 몰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1859년 4월7일자 특별명령 제24호를 통해 “캠프 버어디의 낙타를 모두 산 안토니오로 옮긴후 지질조사단에 동행하도록하라”고 빈톤 소령에게 지시했다. 

빈튼 소령은 낙타 부대의 그래햄 중위에게 낙타몰이 병사에게 낙타에 짐을 꾸리고 부리는 법을 훈련시켜 낙타와 함께 산 안토니오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당시 낙타 우리에는 중동에서 온 몰이꾼은 한명도 없었다. 5명의 몰이꾼 중 하이 졸리와 그리크 조오지는 캘리포니아의 테혼 요새에서 낙타를 돌보고 나머지 몰이꾼은 파머 대위가 이미 해고 한 후였다.

어린 낙타와 새끼가 딸린 낙타를 제외한 24마리 낙타는 낙타 몰이 병사 6명과 함께 산 안토니오로 이동했다. 1855년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를 나온 하르츠(Edward L. Hartz)소위는 낙타를 4마리씩 6개조로 나누고 낙타 몰이 병사가 낙타 4마리를 다루도록했다. 하르츠 소위는 캠프 허드손에서 낙타 한 마리에 보통  4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1859년 5월23일 워싱턴에서 온 지질조사대를 호위하고    텍사스 남서부 리오 그란데 근방  빅 벤드로 향했다. 


스물네 마리 낙타 텍사스 남부 탐험에 동행

노정은 험난했다. 하르츠 소위가 경호하는 지질조사대는 끝도없이 펼쳐진 대서부 황야를 지나 남으로 향했다. 낙타에게는 사료로 하루 옥수수 8-10 파운드가 제공되었으나 길가에 즐비한 관목을 더 좋아했다. 5월 하순의 텍사스는 따끈했다. 지평선에 맞단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저멀리 하늘 한쪽에는 한조각 구름이 떠돌뿐 사위는 고요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평온속에도 하르츠 소위는 언제 습격해올지 모르는 코만치 인디안들을 경계하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일행은 페코스 강을 따라 계속 남으로 나아갔다. 비가 쏟아지면 낙타가 제대로 속력을 내지못했다. 자갈길이나 바위투성이 산길에서는 말이나 노새 그리고 마차가 제대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탐험대는 6월26일 데이비스 요새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후 6월30일 목적지인 리오 그란데로 출발하여 7월19일 빅 벤드 일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지인 허드슨 캠프로 출발하여 8월7일 말과 노새가 포함된 탐험대는 모두 탈진하고 남루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낙타만은 특별히 지친 표정없이 건강했다. 이후 하르츠 소위는 “이번 탐험은 낙타의 도움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다”고 낙타의 헌신을 칭송했다. 그리고 “경험이 없는 낙타몰이 병사들이 제대로 낙타에 짐을 꾸리지 못해 행진중 짐이 땅에 떨어지거나 흘려내려 행진은 자주 지체되었다”고 불평했다.


중동에서 데려온 낙타 몰이꾼 5명 모두 해고 

캠프 버어디의 낙타가 텍사스 빅 벤 지역 지질탐험대에 동원될 무렵 낙타우리에는  중동에서 데려온 낙타 몰이꾼은 모두 해고된 상태였다. 낙타는 웨인 소령이 고용했던 알프레드 레이가 떠난 후1857 년 여름 헨리 램시가 낙타 감독관이 되어 병사들과 함께 그런대로 낙타를 관리하고 있었다.

웨인 소령 후임으로 낙타부대를 돌보던 파머 (Innis N. Palmer)대위는 처음부터 웨인과 포터가 중동에서 데려온 낙타 몰이꾼들이 마음에 들지않았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던 낙타도 점차 영어로 말하는 명령을 알아듣자 파머대위는 1857년 5월20일자 프로이드 장관에게 “중동에서 온 5명의 몰이꾼은 하등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는 혐오스런 존재들”이라고 편지로 보고하고  “이들 몰이꾼을 해고하겠다”고 보고했다.

1857년 7월8일 파머 대위는 5명의 몰이꾼을 모두 해고했다. 그중 하이 졸리와   그리크 조오지는 비어얼을 따라 아리조나 마차길 측량에 따라나서 캠프 버어디에는 없었다. 이중 스미르나에서 온 알리 오그론 슈레이만과 무스타파 오그론 하솜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들 몰이꾼들은 웨인소령이 남겨둔 낙타 실험 예산을 파머 대위가 인출하지 못해   근 반년 동안 월급도 제대로 받지못한  실정이었다.


증기선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몰이꾼

포터는 몰이꾼을 미국으로 데려오면서 고용계약이 해지되면 퇴직금 50 달러를 지불하고 귀국시에는 여비까지 부담하는 조건으로 몰이꾼들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파머 대위는 뉴 올리언즈의 병참장교 탐킨스 (D.D.Tomkins) 대령에게 “그간 미국을 위해 충직스럽게 봉사 한 낙타몰이꾼 두 사람이 귀국차 하루 이틀 안에 뉴 올리안즈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귀국하는 이들에게 알렉산드리아나 스미르나 로 가는 선편과  편리를 제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전 책임을 탐킨스 대령에게 돌려버렸다.

하섬과 슈레이만은 8월4일 뉴 올리안즈에 도착했다. 이들이 나타나자 당황한  탐킨스 대령은 이 난제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지 병참감 제섭 장군에게 문의했다. 고위층 간에는 몇 차례 편지와 전보가 오가다가 드디어 이 난제는 프로이드 장관에게 넘어가 프로이드 장관이 경비를 부담하면서 해결했다. 

처지가 딱하게되었던 하섬과 슈레이만은 어찌어찌하여 8월 말 뉴욕에 도착했다. 그리고 하루 1 달러 짜리 일반 여인숙에서 스미르나로 가는 배편을 기다렸다. 당시 중동으로 가는 선편은 주로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경유하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1인당 운임은 325 달러. 두 사람은 9월12일 증기선 ‘반더빌트’호를 타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향했다.


일인당  배삯 325 달러는 정부가  부담

두 낙타 몰이꾼은 영국의 사우샘프턴 항에 도착한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배를 갈아타야했다. 그러나 그들이 타야할 배는 인도로 가는 영국군인들이 모두 차지했다. 두 사람은 여행사 아메리칸 유럽 익스프레스의 주선으로 ‘오스트라리언’호를 타고 10월12일 이집트로 향했다.

사우샘프턴 주재 미국영사 레온 (Edwin De Leon)은 1857년 12월 4일 국방성에 ‘두 낙타 몰이꾼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리고 이들이 이집트 행 선편을 기다릴 때 제공한 식사비등 경비 45 달러를 지불해달라고 청구서를 보내왔다. 그리고 레온은 웨인과 포터가 고용했던 낙타 몰이꾼 3명이 이보다 먼저 귀국할 때 6 달러를 지출했다며 이미 지출했던 6 달러도 함께 지불하라고 요청했다.  

낙타 몰이꾼에 따른 정부의 지출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1857년 서플라이 호 편으로 낙타 몰이꾼 5명을 미국으로 데려왔던 히프(Gwinn Harris Heap)는 1859년 11월 하이 졸리와 그리크 조오지로부터 퇴직금과 밀린 월급을 대신 지불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이들의 요구에 당황한  히프는 이 편지를 미 육군 병참부 시블리(Ebenezer S. Sibley) 소령에게 보냈다.   병참감 제섭 장군은 1860년 1월 17일 하이졸리와 그리크 조오지의 퇴직급 각각50달러와 밀린임금을 지불하라고 테혼 요새의 데이비드손 중위에게 통보했다. 이렇게 해서 중동에서 데려온 낙타 몰이꾼에 대한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이후 하이졸리는 캘리포니아의 모우리의 국경측량대에 낙타몰이꾼으로 고용되었다가 한 때는 낙타를 몰고 민간 우편물배달에 종사했다. 

한편 테혼 요새에 있던 낙타는 유마요새, L.A , 산 페드로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텍사스의 낙타도 같은 운명이었다. 텍사스 캠프 버어디의 낙타는 램시와 함께 이따금 산 안토니오로 가서 사료를 실어왔으나 1860년 가을 숫놈 낙타는 거세시키라는 지시에 따라 건강한 숫낙타 2 마리만 종자로 남겨두고 나머지 낙타는  모두 성공적으로 거세했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벌어지면서 낙타는 사방으로 팔려가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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