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김 원장 칼럼] 가을, 가을인데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기가 옷깃으로 스며들면 귀뚜라미 소리도,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정겹게 들린다. 아침 일찍 마당에 나가 보면 조그마한 풀잎에 앉은 해맑은 물방울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손 끝으로 살짝 건드려 보면 애기 물방울들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이 멋진 자연이 주는 선물을 어찌 다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 가을이 되면 늘 떠 오르는 말, 사색의 계절.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헤아려 생각한다는 사색의 의미가 가을에 꼭 맞는 말이다.
피닉스의 가을은 너무 짧고 귀한 계절이라 꽁꽁 붙잡아 놓고 싶다. 그래서 이 사색의 계절, 더 많이 생각하고 길어진 깊은 밤이라도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더 많이 책도 읽어야 하고 아무에게서도 방해받지 않고 이 가을을 마음껒 즐기고 싶다.
이제 겨우 두달 밖에 남지않은 달력을 보면서 그래 세월아 달리고 싶으면 달려라. 저 혼자 말없이 뛰어 가는 시간들을 막을 길도 없으니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마음껒 아끼면서 멋지게 살고 싶은 잔잔한 희망을 가져 볼 뿐이다. 가을은 역시 정돈의 시간이기도 하다. 얼마남지 않은 새해를 위해서 필요없는 쌓여진 물건들을 훌훌 던져 버리고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위해서 쓸어 버리는 용기도 필요하다. 금년 가을은 왜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일까? 나이를 더 먹어 무거운 가을이 되어서 일까, 간소하고 더 산뜻한 삶을 위해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요즘 나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다.
얼마전, 올해 95세가 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다. 지금도 한달에 40회의 강연을 하고, 매일 원고지 40장을 집필하는 교수에게 왕성한 활동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퇴하고 쉬었더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다시 일터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일을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한다. 1961년 출판되어 출판역사의 신기록을 세웠고 단행본으로는 최초로 한 해 60만부 이상이 팔렸다는 “영원과 사랑의 대화” 라는 책을 학창시절 읽고 있었다. 연세대 다니고 있던 남동생이 “그 교수님 내 친구 아버님이셔. 그 친구 집에 가면 늘 인사드리고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와.”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툭 던진다. 읽었던 자리 또 읽고 줄 그어 놓고는 또 읽고 하던 시절이 었는데 쉽게 뵙고 온다는 동생의 한마디가 너무 부러웠다. 이 가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려고 책꽂이에서 빼어 놓았다. 그 때의 감동을 다시 느껴 보고 싶다.
이브 몽땅(Yves Montand)의 고엽을 들으면서 아! 이 노래, 어찌 저리도 달콤할 수가 있을까? 그의 목소리 만 듣고도 마치 단풍잎이 사그르르 땅에 떨어지는 그 소리를 들리게 만든다. 가을 노래를 듣노라면 지금은 콧물까지 훌쩍이게 만드는 노래가 또 있다. 부모님 세대에서나 불리던 노래, 고복수의 목소리까지 처량하다고 생각했던 그 노래가 이제는 구수하게 가슴을 울리니 어쩔 수 없이 나에게도 그 시절이 왔나 보다. 인생무상 (人生無常), 누구를 탓하랴.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져진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 출렁 목이 멥니다
가을이면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냥 흘려 보낼 수가 없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계절인데 왜 이용은 “잊혀진 계절”이라고 노래를 부를까?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중략-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 10월의 마지막 밤에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왜 헤어져야만 했을까? 그래서 가을은 슬픈 계절로 남는가 보다.
아름다운 계절, 사색의 계절, 그리고 씁쓸하기도 한 가을, 쓸쓸한 시(詩) 한수가 절로 그려진다.
가을인데
발걸음 재촉하며 달려 왔건만
뒤돌아 보니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인생을 뭐하러 힘들게 공 들였더냐
가을인데
뜨락에 모아놓은 잡동산들이
나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웃더이다
짧은 인생 길게 보고 살아왔더냐
이 가을, 무거운 삶을 내려 놓아야겠다. 나를 위한 삶을 위해서. 조용한 새벽, 창가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책도 접어 놓고 꿈속으로 흘러가 보련다.
10월 25일 2015년
아리조나 한국문화원장
602-361-3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