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샌프란시스코 언덕에 황제의 기를 꽂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외지인을 거부하는 천혜의 낙원 바하 반도
태평양 연안 우후하쿠(Oaxaca) 해변에서 100여 마일 건너 꼬리처럼 기다란 땅은 1533년 헤르난 코르테스가 발견한 이래 아무도 찾지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코르테스를 비롯 몇몇 뉴스페인의 탐욕스러운 야심가들이 땅을 밟았으나 유난스레 거친 땅은 이들의 정착을 거부했다. 달과 별이 유난히 파란 물에 가라앉은 바다는 먼 바다를 달려온 잔 파도에 몸을 떨며 이렇게 태초이래의 세월을 함께했다.
코르테스의 부하 우요아로부터 꼬리처럼 바다에 담겨진 땅은 섬이 아닌 반도라는 바하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을 얻은 채 또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코르테스에 의해 영롱한 진주를 품은 푸른 조개가 지천으로 연안에 깔려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아무도 찾지않던 금단의 땅에 바다의 보물을 찾아 탐욕스런 야심가들이 몰래 바다를 건너와 진주를 품은 푸른조개를 캐면서 천혜의 땅은 탐욕에 오염되기시작했다.
황실은 비밀리에 진주를 채취하는 탐욕자들에게 진주채취 면허와 정착금을 주고 정착을 시도했다. 한때 카보넬, 코르도바, 오르테카같은 진주채취꾼은 정착촌을 이루어 유순한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진주채취에 성공했다. 정착촌이 호황을 이루자 몇차레 사제들도 정착촌을 찾아 전교도 했다. 그러나 잠채꾼들은 유순한 토착민들을 노예처럼 대했다. 토착민들은 드디어 탐욕스런 잠채꾼들을 공격하면서 자연 이들의 정착촌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또 한번 아무도 찾지않아 잊혀졌던 반도에 필립핀을 오가던 비즈카이노가 1596년 ‘평화’라는 뜻을 가진 오늘의 라파즈 (La Paz) 만에 정착촌 건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코르테스가 옛날 실패했던 것처럼 비즈카이노도 정착민의 식량 자급에 실패하면서 정착하지 못했다. 또 다시 바하 캘리포니아는 잊혀진 땅이 되었다.
시나로아 정착촌에 수비대 설치
태평양 연안 시나로아에 수비대가 세워지면서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던 변경에 탐욕스러운 야심가들이 출몰하면서 정착촌이 들어섰다. 이어 정착민을 보호하려 시나로아 수비대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을 평정했다.
뉴스페인 당국자는 근 100여 마일 건너 바하 캘리포니아까지 탐욕의 눈길을 꽂았다.
1678년 아톤도(Isidor de Attondo y Antillon: 1639,12.3일 영세)가 시나로아의 수비대장이 되었다. 스페인 발티에라 (Valtierra)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아톤도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1658년 군문에 들어갔다.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한 아톤도는 1669년 야성의 땅 신천지 뉴스페인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1676년 노련한 역전의 용사만이 차지할 수있는 변방 시나로아의 수비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스페인 제국은 멀리 태평양 바다에 있는 필립핀을 정복하고 뉴스페인의 아카폴고 사이에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먼 바다를 오고가는 무역선을 위한 기항지로 태평양 연안 캘리포니아가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부상했다. 당시 뉴스페인 총독 리비에라는 바하 캘리포니아에 정착촌 건설이 시급하다고보고 신임 수비대장과 바하 캘리포니아에 정착촌을 건립하기로 약속했다. 리비에라 총독은 이같은 사실을 황실에 보고하고 황실은 정착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황실은 아톤도에게 바하 캘리포니아 정착을 승인하고 정착민과 토착민 전교는 예수회가 전담하기로했다. 아톤도는 또한 캘리포니아의 제독도 겸하게 되었다.
바하 반도 정착촌 건립차 함선을 건조
1679년 5월 23일 아톤도는 시나로아로 출발하기 앞서 로스 레메디스 성당에서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미사를 올렸다. 아톤도는 우선 정착민과 보급품 및 자재를 실어나를 60톤급과 70톤급 함선 2척을 시나로아 드 니오 선착장에서 건조하기로 했다. 이곳은 19년전 예수회 신부 페레즈가 선교하던 지역이다. 선박 건조에 필요한 재목은 현지에서 조달하고 이후 황실과 정산하기로했다. 황실은 또한 선박 건조에 필요한 베라 크루즈에서 시나로아까지 운반할 말과 노새를 임대하고 짐을 꾸릴 비용 3,216달러를 미리 지불했다. 또한 2개의 삼각 돛, 선구, 밧줄등 필요한 자재와 총기제조 전문가와 24명의 선원, 4명의 키잡이 3명의 목수, 배의 틈새를 막는 전문 배밥꾼 2명이 연이어 니오 조선창에 도착했다.
2개월 후 6백파운드의 화약과 정착촌 건설에 필요한 100여개의 곡괭이, 30여 명의 병사, 24정의 장총, 50정의 화승총, 8문의 대포가 도착했다. 그리고 삼각돛과 건조비 7,977달러가 도착했다. 이어 정착과 항해에 필요한 80여 배럴의 식수와 성당에 달 종 2개는 출발 예 정지인 누에바 갈리시아의 차카라로 보내졌다.
또한 황실은 아톤도에게 6천 페소를 추가로 보냈다. 탐험대와 정착민들이 현지 토착민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토착민을 위한 식품, 여인네 속옷, 모직섬유, 작은 손칼, 모자와 대화시 심심풀이용 과자와 선물까지 세심하게 배려했다.
2년 내 선박 건조를 마치고 출항한다는 계획아래 아톤도는 1679년 5월 25일 오늘날 시나로아의 수도가 된 산펠립스와 해안 중간지점인 시나로아 강 근방 니오 부락으로 향했다. 이곳은 1536년 프로라다로 향하다 난파한 후 8년 간 대륙을 떠돌던 디 바카가 뉴스페인으로 향하던 중 잠시 머물던 곳이다. 아톤도가 니오에 도착했을 때 인근 삼림지역은 벌목꾼들의 거친 숨소리, 고함소리, 도끼질 소리 그리고 톱질 소리로 요란했다. 다듬어진 아름드리 나무는 시나로아 강을 타고 니오 조선장으로 향했다. 선바 건조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바하 캐리리포니아 탐험 소식을 듣고 1683년 3월 마뉴엘 루큐를 비롯한 선원8명이 베라 크루즈에서 멕시코 시티에 도착했다. 이들은 엄격한 신체검사와 실기 테스트를 거쳐 모두 만족한 결과로 채용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탐험대가 출항할 차칼라에서 본 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이들은 선급으로 일인당 100달러와 여행중 식대도 지급되었다. 황실은 또한 이들에게 타고 갈 노새도 제공했다.
과다라하라에 도착한 8명의 선원은 마을 유지 제발로스를 찾았다. 지친 노새 대신 힘세고 지치지 않은 노새로 바꾸어 줄것을 청했다. 니오까지는 아직도 300여 마일. 제발로스는 노새 12마리를 한 마리당 왕복 6달러에 세내었다. 8마리는 선원 8명이 타고 4마리는 짐을 실었다. 마침 마을 금고에는 현찰이 모자랐다. 제발로스는 마을 유지에게 돈을 빌려 노새를 세내고 이들의 식대를 마련해주었다. 당시 규정에는 무구 (*칼이나 투구, 갑옷같은 무기) 제작자나 배밥꾼에게는 하루 식대 50센트, 일반 선원에게는 38센트가 지급되었다.
바하 반도 선교 자청한 키노신부
키노신부는 1681년 “기쁜 마음으로 바하 캘리포니아의 토착민을 위한 선교를 받아드리겠다”고 주님께 감사드린다는 편지를 자신을 후원하는 마드리드의 공작부인에게 서신으로 전했다. 키노 신부는 1681년 10월 노새에 짐을 싣고 뉴멕시코를 떠나 1682년 3월 선박 건조에 어수선한 니오 조선창에 도착했다.
3월25일 키노 신부는 두랑코의 바르토로메 주교에게 바하 반도에서 선교할 수 있는 면허를 편지로 신청했다. 5월24일 면허를 수령했다. 이후 과다라하라의 후앙 주교를 예방한 후 광산지역 로사리오를 지나 니오로 돌아왔다. 키노 신부는 로사리오를 지나면서 6월 3일 공작부인에게 “주교님과 총독은 나를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신천지 거대한 외지로 보냈습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순명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바하 반도에는 키노 신부와 고니신부 외에 수알레즈 신부를 포함하여 3명의 사제가 선교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출항 며칠전 키노 신부와 고니 신부는 후앙 주교가 보낸 특사를 통해 새로 선교면허를 받았다. 수알레즈 신부는 출항 당일 복통을 이유로 탐험대에 참가하지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