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북미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탐욕자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뒤늦게 해양강국이 된 영국, 신대륙을 경작지로 운영
멕시코를 비롯한 스페인 식민지에서 산출한 노다지가 무한정 스페인 제국으로 반출되자 유럽의 제국들은 이같은 사실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다. 특히 해양강국으로 부상한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 (Francis Drakes)같은 해적은 보물선을 성공적으로 약탈하여 신대륙에서 벌어들인 스페인의 이익을 나누었다. 1세기나 늦게 대양에 뛰어든 영국은 약탈한 신대륙의 보화를 발판삼아 정복과 탐욕을 충족하기위해 대서양에 뛰어들었다. 아직도 유럽의 강국들이 신세계로 향한 뱃길찾기에 열중하고 신세계의 노다지에 탐욕의 발톱이 들어날 때 영국은 신세계의 기름지고 너른 땅에서 경작으로 부를 창출한다는 새로운 개념의 식민지 정책에 열중했다.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위해서는 기름지고 소출이 풍부한 많은 땅을 확보한 후 이를 이주민에게 분양한다는것이다.
1583년 험프리 길버트 (Humphrey Gilbert)경은 소규모 선단에 식민지 이주자를 태우고 뉴펀드랜드의 세인트 존(St. John) 항구에 상륙했다. 그리고 섬 전체를 영국령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길버트 경은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태풍에 휩쓸려 1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이 침몰했다. 험프리 길버트 경도 목숨을 잃었다.
험프리 길버트 경의 이복형제인 월터 랄레이 (Walter Raleigh)경은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시험 경작을 시도했다. 1584년 랄레이 경은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북미 대륙에서 새로 개간할 땅을 개척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몇주 후 랄레이경은 원주민 2명과 함께 귀국했다. 그리고 이곳을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 버어지니아라고 불렀다. 1584년 4월 랄레이 경은 7척의 선박에 다수의 이주 희망자를 싣고 신대륙으로 향했다. 다음해인 1585년 랄레이 경은 노오스 캐롤라이나 연안 로아노크 (Roanoke) 섬에 북미대륙 최초의 영국 식민지를 세웠다. 영국측은 이를 위해 납치해 영국으로 데려갔던 두 원주민을 데려와 원주민과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최초의 식민지는 여러가지 이유로 실패했다. 랄레이 경은 1587년 경작에 알맞은 영토를 확보한 후 다시
정착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엘리자베스 (* 1553년 -1603년 3.24: 1558년 11.17일 여왕 대관식-1603년 3.24 사망) 여왕이 사망한지 4년 후인 1607년 5월 24일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신대륙에서 본격적으로 경작하여 부를 창출하려는 버지나아 회사 (Virginia Co.)를 세웠다.
버어지니아 회사, 식민지 제임스타운 설립
버어지니아 회사는 북위 34도에서 41도 사이의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쪽 연안을 식민지한다는 목적으로 제임스 1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후 런던회사도 버어지니아 회사에 합류했다. 이 회사의 본거지인 제임스타운은 1616년부터 1699년까지 83년간 북미대륙의 영국 식민지 수도로 영국이 북미대륙을 통치하는데 큰 역활을 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복 언니인 메리여왕의 아들인 제임스 1세로부터 버어지니아 일대의 식민지 토지불하권을 위임받고 버어지니아 일대에 이주희망자를 불러들여 제임스타운이라는 정착촌을 설립했다.
초기 이주자는 대부분 사법당국의 손길을 피하려는 범법자나 극빈자. 1606년 12월 144명의 이주자들이 수전 컨스탄트 (Susan Constant), 곧 스피드 (God speed), 디스커버리 (Discovery) 배 세 척에 나누어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이들은 다음해 봄인 1607년 4월 26일 체서피크만에 생존자 104명이 상륙했다. 항해 중 4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주자들은 제임스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 회사측이 원하는 곳인 수비가 용이하고 3면이 바다에 면한 곳을 정착지로 택했다. 당시만해도 이곳에는 원주민이 살지않고 수심도 깊어 타고 온 배가 기항할 수 있는 스페인 세력이 미치지않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그러자 이주자들은 장기간에 걸친 여행에다 영양결핍, 질병 등으로 죽어가 살아남은 이주자는 고작 떠날 때144명의 약 70퍼어센티지에 불과했다. 1607년 6월 15일 5개의 대포를 진열하고 3면에 성채를 갖춘 요새를 완공했다.
구두와 혁대를 삶아먹으며 아사를 면해
그러나 불결한 식수와 오랜 겨울가뭄으로 아사자가 늘어나자 선장 뉴포어트가 양식을 구하러 영국으로 떠났다. 살아남은 이주자들은 인근 원주민의 도움으로 연명하면서 구두와 혁대를 삶아먹으며 아사를 면했다. 가뭄이 계속되자 그간 도움을 주던 원주민 포우하탄 (Powhatan)부족도 양식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과도한 도움요청에 이주자들은 요새 밖 출입도 어려웠다.
1612년 버어뮤다 난파선 선원들이 연안을 떠돌다가 제임스타운 요새를 찾았다. 난파선 선원중에는 인근 포우하탄 부족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 (Pocahontas)와 결혼한 존 롤프 (John Rolfe)도 있었다. 그가 제임스타운 요새를 찾았을 때 그는 원주민들로부터 구한 담배씨앗을 요새의 정착민에게 소개했다. 신세계 원주민들이 즐기는 담배는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전해져 이미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생산되는 담배의 무역권은 스페인측에서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같은 담배를 이제 버어지니아 식민지에서 이주민들이 직접 재배하여 영국 등 유럽에 직접 판매하게 되었다. 존 롤프는 제임스 강을 따라 담배농장을 경영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를 독점거래하는 버어지니아 회사도 역시 많은 소득을 올렸다.
포카혼타스, 담배농장주와 결혼하다
제임스타운 주변을 통치하는 포우한타스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는 1595년 마토아카 (Matoaca)에서 태어났다. 원주민들은 그녀를 코쿠움 (Kocoum)이라고 불렀다.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 연안을 찾은 영국 상선을 교역차 방문했다. 이후 선장 사무엘 아르갈(Samuel Argall)은 포카혼타스를 협상용 인질로 납치해 제임스타운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 영어와 영국의 관습을 배우고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레베카 (Rebecca)라는이름으로 영세를 받고 1613년까지 인질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15세때인 1614년 4월 5일 담배농장 바리나 (Varina)를 경영하는 존 롤프와 결혼하고 다음해인 1615년 아들 토마스 롤프를 두었다.
버어지니아 회사는 신대륙으로 이주민을 끌어들이려 원주민 포카혼테스와 존 롤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신대륙에서 담배농장으로 성공하고 또한 원주민 여인과의 사랑이야기는 영국인 사회는 물론 유럽 사회에도 큰 화제가 되었다. 두 사람은 1616년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두 사람은 화이트 홀에서 국왕 제임스 1세가 주최하는 연회에도 참석했다. 포카혼테스는 영국 런던에 머무는 동안 플리머스의 파투세트 (Patuxet)에서 납치되어 노예생활을 하는 스콴토(Squanto)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자세한 접촉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존 롤프 부부는 1617년 3월 신대륙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배가 테임스 강의 글라브센드 (Gravesend)에 이르렀을 무렵 천연두와 폐렴으로 시달리던 포카혼테스는 상륙하여 병원을 찾았으나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영결식은 1617년 3월 21일 글라브센드의 성 조오지 성당에서 거행됐다. 1658년 그녀를 기리는 실물 크기의 동상이 교회내에 세워졌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