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절대자는 원주민 노예를 도구삼아 청교도에게 추수감사절을 선물했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사모세트와 함께 플리머스를 찾은 스콴토 (Squanto)의 어린 시절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스콴토는 1580년 오늘의 플리머스인 파투세트 지방에서 왐파노아그 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스콴토의 영어는 매우 유창하여 1605년에는 선장 웨이머스 (George Weymouth)에게, 그리고 1614년에는 선장 토마스 헌트에게 두차례 납치되어 영국 등 유럽에서 노예생활을 하지않았을까 추측한다. 웨이머스는 본래 영국의 항해사겸 탐험가였다. 그는 1601년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 탐험과 항해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605년 웨이머스는 영국의 사업가 페르디난토 고르지 (Ferdinanto Gorges)의 후원으로 메인과 마사추세트 연안을 탐험했다. 그와 동승했던 로지어 (James Rosier)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스콴토가 1605년 1차 노예가 되었다가 어쩌다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스콴토 두번 납치되어 노예가 되다
로지어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늦은 오후 8시경 일행은 작은 보우트를 타고 해안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마침 원주민들의 작은 커누 두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중 1척의 커누에는 3명의 건장한 원주민들이 타고있었다. 두명의 원주민은 마침 횃불아래에 있어 그 모습이 드러났다. 나머지 한명은 우리가 타고온 보우트를 향해 무어라고 지껄였다. 우리는 그들을 유인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 완두콩 통조림과 빵을 건넸다. 그들은 배에서 내려 내륙아래 멀리 떨어진 해안가 모래사장을 걸어가 자리를 잡고 빵과 통조림을 먹었다. 잠시 후 한 원주민이 남은 통조림을 가지고 나머지 두 원주민과 함께 커누에 올랐다. 3명의 원주민 중 한 명은 어려보였다. 우리는 3명의 원주민 중 어려보이는 원주민 아이를 영국으로 데려갔으면했다. 원주민들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호의를 보였다. 잠시 후 선장이 도착했다. 우리는 해안에서 서성이는 3명의 원주민까지 잡자고 상의했다. 그리고 선장이 가져온 작은 상자를 열고 별것도 아닌 물품들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들은 물품에 열중하느라 외지인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을 배에서 내려주었다. 그들이 뒤돌아 가려할 때 일행은 기마선수처럼 배에서 뛰어내려 원주민들을 덮쳤다. 그러나 그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라 잡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긴머리는 나꿔채기에 알맞았다. 이렇게 5명의 원주민을 배에 태우고 활과 화살까지 실려있던 2척의 커누까지 끌고 연안을 떠났다. 조오지 웨이머스가 납치한 5명의 원주민은 타하네도(Tahanedo), 아모렡(Amoret), 스키코와(Skicowaarow), 마네도(Manedo), 사타코모이트(Sattacomoit)였다. 여기에 스콴토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스콴토가 어디에서 영어를 배우고 어떻게 대서양을 건넌 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러나 그가 1614년 노예가 되어 스페인에서 유랑하다 런던에 도착하여 영어를 익힌 짧은 기간에 그처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에 의문을 가진 연구가들은 스콴토가 1605년에 일차로 납치되고 1614년 두번째 납치되었다고 믿고있다.
스페인 노예시장을 유랑하는 스콴토
스콴토는 1580년 파투세트 인근에서 태어났다. 일부 사가는 스콴토가 1614년 파투세트 연안에 정박한 토마스 헌트 (Thomas Hunt :1598-1655)가 지휘하는 선원들에게 납치된 후 1619년 천행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토마스 헌트는 14세때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정착지의 목사가 된 아버지 로버트 헌트를 따라 제임스타운에 정착했다. 목사 로버트 헌트는 탐험가이며 제임스타운 지사를 역임한 존 스미스 (John Smith: 1580-1631)와 친교가 두터웠다. 토마스 헌트는 아버지의 소개로 나이 20세 때 존 스미스의 탐험선단에 합류하여 배 한 척을 지휘하는 선장이 되었다. 존 스미스는 대구의 만 연안을 탐험하며 고기도 잡고 원주민들이 좋아하는 짧은 칼이며 주전자 등 유럽제 철제물품과 원주민들이 잡은 비버모피나 물고기, 목재 등과 교환했다. 존 스미스 선장은 한 때 원주민들과 장총 100여 자루와 1만장이 넘는 비버모피를 교환하기도 했다. 존 스미스는 배에 가득찬 물품을 처분하기위해 영국으로 돌아가며 젊은 토마스 헌트에게 선단을 지휘하여 추가로 물품을 부지런히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원주민으로부터 물품을 확보하고 고기잡는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마침 토마스 헌트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노예장사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배가 오늘의 플리머스인 파투셑에 정박하자 호기심 많은 원주민들을 선박으로 유인했다. 이때 절대자의 도구로 선택된 스콴토는 20명의 왐파노아그 원주민과 함께 헌트의 배에 오른 후 쇠사슬에 매여 배의 선창에 매였다. 헌트는 20명의 노예를 싣고 다시 ‘대구의 만’ 입구 나우세트 연안에서 7명의 원주민을 추가로 납치한 후 모두 27명의 노예를 싣고 노예시장이 있는 스페인 남부 말라가 (Malaga)로 배를 몰았다.
노예시장에서 사제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되다
어둡고 습기찬 선창에서 날 생선과 돌처럼 굳은 빵으로 연명하며 쇠사슬에 매인 채 6주간을 항해한 스콴토는 말라가 항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악독한 헌트가 잡아온 27명의 노예는 말라가 노예시장에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헌트는 처분할 수 있는 노예는 처분해 작은 이익을 취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절대자의 피조물인 인간을 노예로 상품화하는 것을 금했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지 못해 떠돌던 스콴토와 몇몇 동료들은 말라가 지역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자유의 몸이 되고 이곳에서 사제들을 통해 절대자를 받아들였다.
한편 파투세트과 나우세트의 왐파노아그 원주민들은 27명의 동족들이 납치되자 불같이 노했다. 더이상 영국과 프랑스 상선들은 비버모피 등 물품 교역차 인근 연안에 정박하지 못했다. 1617년 프랑스의 상선이 연안에 정박한 후 원주민의 공격으로 불타버리고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살해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