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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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북미주 지형을 바꾼 염장대구와 비버모피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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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알바니, 오린지 요새의 항복 
9월 10일 요하네스 데커는 뉴욕에서 154마일 북쪽에 위치한 오린지 요새로 배를 몰았다. 오늘의 알바니 (Albany)가  이곳이다. 주민들에게 영국군이 몰려온다는 것을 경고하고 수비대를 꾸미려 했다. 그러나 영국측은 오린지 요새를 별다른 저항없이 접수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항만이 봉쇄된 것을 아는 뉴네델란드가 임명한 부총독 요하네스 디 몬타니 (Johannes de Montagne)는 장차 이곳을 통치할 나라는 영국이라고 생각하고 1664년 9월 24일 요새 전체를 영국측에 넘겼다. 카트라이트 (Cartwright) 대령이 일대를 수비할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요새 책임자로 대위 맨닝이 요새를 지휘하게 되었다. 강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카트라이트는 에소푸스 정착촌을 별다른 저항없이 접수했다. 그는 또한 알바니에서 처럼 정착민을 회유하고 네델란드 측에서 임명한 공무원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곳에 머물면서 카트라이트는 네델란드와 이로쿼이 지역에서 오래 지낸 대위 대니얼 브로드 헤드 (Daniel Brodhead)지휘 아래 두었다.

뉴암스텔의 함락과 네델란드의 퇴각 
이 무렵 니컬스는 카트라이트를 오린지 요새로 보내 알링톤 백작의 친척인 로버트 칼 경을 스웨덴으로부터 네델란드가 일찌기 접수한 네델란드 영토 남쪽으로 보냈다. 영국 측은 이곳에 위치한 알테나 (Altena)요새를 별다른 저항없이 접수했다. 뉴암스텔의 알렉산더 드 히노이사스 (Alexander D’hiinoyossa)는 극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캐시미어 요새 (Cashimir)로 퇴각했다. 칼 경은 요새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점령했다. 점령후 그의 병사들은 인근 마을을  포위했으나 정착민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그는 정착민의 재물을 약탈하고 수확한 곡물과 양 200마리와 말과 소도 약탈했다. 그리고 양조장과 제재소도 부셨다. 약탈을 마친 카알은 약탈범을 이끌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델라웨어의 르이시 (Lewes)마을 근방 피이터 코온네리존 프로코헤이 (Pieter  Corneliszoon Ploockhoy’s Mennonite) 정착촌을 철저히 약탈했다. 니컬스는 이후 뉴암스텔을 방문하고 이곳을 뉴캐슬 (New Castlse)이라고 바꾸었다. 이처럼 영국은 뉴네델란드와 뉴암스텔담을 대포 한방 쏘지않고 점령하면서 네델란드는 북미대륙에서 힘을 잃었다. 대신 영국은 북미대륙에서 아직도 버티고있는 프랑스와 일전을 벌여야했다.

캐나다에 정착한 프랑스 모피 사냥꾼
16세기 초,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남미에 식민지를 꾸리고 무한정 노다지를 본국으로 실어나르자 스페인과 경쟁관계였던 프랑스도 노다지를 캘 식민지 확보에 나섰다. 1534년 프랑스 측은 탐험가겸 항해사인 쟈크 까르띠에게 동아시아로 가는 뱃길을 찾도록 했다. 20일간의 항해끝에 뉴펀드랜드를 지나 세인트 로렌스 만에 도착한 쟈크 까르띠에는 처음 대면한 이로쿼이 원주민이 세인트 로렌스 강을 가리키며 카나다 “Kanada”를 외치자 이곳을 캐나다(Canada)라고 불렀다. 원주민들이 외친 카나다라는 말은 ‘마을’을 뜻했다. 이말이 지금 캐나다라는 말의 기원이다. 쟈크 까르띠에는 이어 세인트 로렌스 강를 따라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올라 이곳을 ‘국왕의 산’이라는 ‘몽레알 (Mont  R’eal)’이라고 불러 오늘의 ‘몬트리얼’ 도시가 생겼다. 이로쿼이 추장은 강물을 따라가면 신세계가 나온다고  했으나 쟈크 까르띠에 일행은 급류에 밀려 더이상 탐험을 중단했다. 그리고 1541년 오늘의 퀴벡인 스타코나에서 겨울을 나며 혹한과 괴혈병으로 많은 대원을 잃었다. 퀴벡은 원주민 말로 ‘강폭이 좁아진 곳’을 의미한다. 카르띠에는 이후 원주민들과 교역한 많은 비버모피를 싣고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는 근 60여년간 캐나다를 잊었다. 1604년 프랑스의 샤무엘 디 샹프렝은 까르티에가 세인트 로렌스 만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고 프랑스의 영토라고 선언한 캐나다를 다시 찾았다. 샹프렝은 까르띠에가 혹한과 괴혈병으로 많은 대원을 잃은 오늘의 포트 로얄 (Port Royal)에 정착하고 믹맥 (Micac) 부족과 비버모피 교환을 했다. 그리고 퀴벡에 정착촌을 마련한 후 원주민들과 본격적으로 모피교역을 시작했다. 1650년대 초 퀴벡에는 이미 프랑스 정착민 70여명이 모여들어 원주민과 모피거래를 했다.

1605년 통나무 거처에서 비버모피 교역
1605년 노바 스코샤의 어내폴리스 강  하구에 몰려든 프랑스 정착민들은 통나무’로 거처를 마련하고 부지런히 원주민들과 비버모피를 교역하자 자연 이곳에는 마을이 형성됐다. 정착민들은 통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원주민 습격에 대비했다. 이곳은 이후 포트 로얄이 되고 이후 아카디아 (Acadia)라고 불렀다. 1650년 200여명이던 정착민은 급격히 늘어나 20년후인 1670년에는 370명 그리고 1750년에는 1만여명에 달했다.
프랑스가 아카디아와 퀴벡에 정착촌을 마련하고 뉴프랑스라고 불렀을 무렵 뒤늦게 북미주에 진출한 영국은 마사츄세트 만 인근에 뉴잉글랜드라고 부르는 정착촌을 세웠다. 뉴잉글랜드 정착촌은 영국 본토와 카리브 해로부터 상선들이 보스턴 항을 찾아 뉴프랑스의 퀴벡이나 아카디아보다 발전이 빨랐다. 그러자 뉴프랑스는 지금의 노바 스코샤 (Nova Scotia)인 포트 로얄과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Prince Edward Island) 그리고 뉴브런스윅 (New Brunswick)을 뉴프랑스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윌리암 알렉산더 경에게 아키디아를 하사했다. 알렉산더 경은 하사받은 아키디아를 새로운 스코틀랜드인 노바 스코샤 (Nova Scotia) 부르고 식민지 건설에 나섰으나  결국 실패했다.

아카디아 차지하려 영국, 프랑스간 긴장
당시 영국은 뉴펀드랜드에 정착촌을 마련하고 황금어장인 그랜드 뱅크 (Grand Bank)에 무진장인 대구잡이에 열을 올린데 반해 프랑스는 세인트 로렌스 강줄기를 따라 정착촌을 마련하고 원주민과 부지런히 모피교역을 했다. 자연 아카디아를 장악한 측이 대구잡이와 모피교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구와 모피 두 가지를 차지하려 영국과 프랑스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로쿼이 원주민은 영국측에, 그리고 휴론 족과 믹맥 족은 프랑스 측에 줄을 서면서 피나는 살육전이 계속되었다. 1713년 두 나라는 위트레흐트 (Peace of Utrecht) 평화조약으로 갈등은 봉합되었으나 프랑스는 영국 측에 허드슨 만과 뉴펀드랜드 그리고 아카디아를 내주었다.
1775년 영국측은 아카디아 거주 프랑스 인들에게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강요했다. 프랑스 정착민들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영국 측은 1만여명의 프랑스계 정착민을 영국 함선의 선창바닥에 밀어넣고 오늘의 루이지애너로 실어날랐다. 항해중 많은 프랑스계 정착민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루이지애너에는 약간은 특이한 루이지애너식 프랑스어가 사용된다. 한편 휴론 부족은 샹플렝에게 이로쿼이 부족과 대결할 수 있는 화승총같은 유럽식 화력을 제공하면  서쪽 내륙으로 나가는 길을  안내하겠다고 제의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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