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디 안자 1세의 비극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디 안자 1세의 비극
후앙 보우티스타 디 안자 1 (1693.6.29-1740.5.9 Juan Bautista de Anza1)은 구미열강이 선점하려 열을 내는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육상의 길을 내는데 앞장섰다. ‘
당시 뉴스페인은 소로라 일대를 최변방으로 삼고 약탈을 일삼는 아파치들과 대치 중으로, 감히 콜로라도 강 건너 알타캘리포니로 가는 길을 내는데는 여유가 없었다. 하느님을 접해보지 못한 불운한 원주민을 두고 가톨릭 사제들도 더이상 미지의 땅에서 신음하는 원주민을 찾아 감히 나서지도 못했다.
맨 처음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을 찾아나선 디 안자 1세는 뉴스페인 최변방 소노라 (Sonora)의 프론테라스 (Presidio of Fronteras) 수비대장이었다. 스페인 바스크 (Basque) 지역의 헤르나니 (Hernani) 마을의 약사의 아들로 태어난 디 안자는 겨우 스페인 말을 이해해 알아들을 상태에서 야망을 품고 신세계 뉴스페인을 찾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 그는 무작정 바스크 출신들이 모여살고 특히 어머니의 친척들이 사는 시나로아의 꾸리아칸 (Curiacan)을 찾았다. 그러나 디 안자는 그곳에 잠시 머문 후 은광 개발붐이 한창인 소노라의 알라모스 (Alamos)로 거처를 옮긴 후 1716년부터 1720년 사이 오늘의 소노라, 헤르모시요 (Hermosillo)와 남 아즈페에서 은광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소노라의 바소추카의 산호세에서 광산권을 사들여 거금을 마련했다.
야망이 큰 디 안자는 신천지에서 뜻을 펴려면 무엇보다 군인의 길이 최고라는 것을 자각했다.
디 안자가 신천지에 몸을 던진 지 9년만인 1721년 8월 2일 안토니오 베제라 니토 (Antonio bezerra Nieto) 대위겸 사령관이 지휘하는 치와와 지역의 야노스 (Janos) 수비대의 정규 기마대 소위로 입대했다. 그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지 9년만이고 그의 나이 28세였다. 입대 당시 디 안자는 강인한 체격에 은빛이 도는 흰 수염 , 밤 열매 빛같은 옅은 갈색 머리결을 휘날리는 미모의 사나이였다. 뛰어난 지력과 강인한 체력을 갖춘 디 안자는 사령관 니토의 총애를 받고 사령관의 딸 마리아 로사 베제라 니토 (Maria Rosa Bezerra Nieto)와 1722년 결혼했다. 그리고 중위로 진급했다.
그무렵 프론테라스 주둔 요새 사령관 그레고리오 알바레스 투논 퀴로스(Gregorio Alvares Tunon y Quiros) 대위겸 사령관은 수년간 소노라 일대의 유지들과 부정에 연루되어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면서 법정에 서기위해 멕시코시티로 소환되었다. 디 안자는 대위로 승진하면서 프런테라스 요새 기마대의 지휘봉을 잡게되자 재빨리 요새를 정비하고 아파치들의 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디 안자는 산루이스 (San Luis)와 산타 쿠루즈 (Santa Cruze) 강 상류 유역에 병사들을 주둔시켜 아파치들의 준동을 막자 자연 주민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디 안자는 아리조나 남부지역의 아파치 준동을 억제하여 구에바비 (Guevavi), 산마테오 (SanMateo), 시쿠리수타 (Sicurisuta)와 소포리 (Sopori) 지역에 목장을 개설했다.
디 안자는 프론테라스의 요새 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시장직도 겸했다. 마침 그의 오랜 친구인 지역 민병대장인 베르나르도 디 우레아 (Bernado de Urrea)가 운영하는 아리조나 목장 인근 야산에서 은광이 터졌다. 은광은 야산 일대를 더드먼 안 원주민의 발길에 커다란 은괴가 걸리면서 발견되었다. 이같은 소문이 퍼지자 은이 발견돼 야산은 몰려든 주민으로 혼잡을 이루었다. 사령관겸 지역 치안판사를 겸한 디 안자는 멕시코 당국이 은의 소유권을 확정할 때까지 발견된 은을 압류한 후 지켜야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친구 우레아의 목장에 머물면서 멕시코 시티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행정문제를 처리했다. 그가 보내는 문서의 발신처와 수신처는 우레아의 아리조나 목장이었다.
아리조나라는 의미는 파파고 인디안 말로 “작은 내가 흐르는 마을”.
은광 소동이 후 아리조나라는 지명은 멕시코를 비롯하여 미국 전역에 소개되었다. 아리조나가 미국 영토로 편입될 때 당시 링컨 대통령은 여러 후보이름 중에서 아리조나를 선택하여 오늘 아리조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시 링컨 대통령은 아리조나에서 생산된 은괴로 만든 잉크스탠드에 넣은 잉크로 아리조나를 공식 지명으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디 안자는 그후 열강들이 선점하기위해 다투는 알타캘리포니아에 스페인 정착촌을 세우기위해 콜로라도 건너 알타캘리포니아 일대를 탐험하기로 했다. 디 안자는 당시 뉴스페인 38대 총독 부카레일리(Antonio Maria de Bucareli y Urusua)에게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정착민과 탐험대원을 위한 보급로 개척을 허락해줄 것을 청원했다
1740년 5월 9일 디안자 사령관은 병사들과 함께 프론테라스 요새에서 산타 쿠루즈 강변 북쪽을 따라 콜럼비아 강까지 이르는 안전한 길을 둘러본 후 마침 사랑스런 가족들이 기다리는 프론테라스 요새로 돌아가고 있었다. 디 안자와 기마병들이 테레나테 목장과 산타 마리아 수암카 (Santa Marlak Suamca)의 산등성이 아래 좁은 오솔길에 이르렀을 무렵 저멀리 서편하늘은 용트림하듯 붉은 노을이 꿈틀거렸다. 디 안자는 멀리 앞서가는 기마병들을 바라보며 눈이 부시게 화려한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근 40마일 거리의 요새안에서 뛰어노는 어린 아들인 만 세살이 채 안된 디 안자 2세와 1732년 태어난 호세파 그레고리아 그리고 흙벽돌 관사에서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인 마리아 로사 (Maria Rosa BEzerra Nieto)를 떠올렸다. 디 안자는 탐험을 나서는 기마병들이 요새를 빠져나갈 무렵 너른 연병장 한편에서 기마병들 선두에서 떠나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던 디 안자 2세를 생각하며 잠시 미소지었다.
디 안자 사령관 부인 마리아 로사는 북미주 태생 스페인인이었다. 뉴스페인 최북방 치와와의 야노스 (Janos) 요새 사령관의 딸인 마리아 로사는 1722년 아버지의 부하인 야노스 기마대의 소위인 디 안자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디 안자 소위는 28세로 마리아 마뉴엘라 (Maria Manuela)와 마리아 게투루디스 (Maria Gertrudis)라는 이름의 두 딸이 있었다. 당시 디 안자 소위는 옅은 갈색 머리에 흰 수염을 가진 단단한 몸매의 청년이었다. 뉴스페인 최변방 야노스 요새는 약탈을 일삼는 아파치와 호전적인 원주민들의 공격과 약탈로 마음편한 날이 없었다. 결혼 후 1725년 1월 마리아는 첫 아들 프란시스코 디 안자를 가졌다. 소위였던 디 안자는 다음해 중위로 진급했다. 그리고 1726년 두번재 아기 마리아 마르가리타가 태어나고 디 안자는 부정으로 무러난 전임 프론테라스 사령관 그레고리오 알바레스 튜농 퀴로스 (Gregorio Alvares Tunon y Quiros)가 멕시코 시티 법정에 서자 대위로 진급하면서 프론테라스 요새 사령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사령관이 된 디 안자는 우선 기병대의 규율을 잡고 일대의 정착민을 아파치들의 약탈에서 보호하고 기마병을 피메리아 알타의 산타 쿠루즈 강변 상류지역에 주둔시켜 정착민들이 이전하여 생활하도록했다. 또한 스스로 구에바비, 산 마테오 등 5개지역에 목장을 운영하면서 정착민을 안심시켰다.
디 안자 2세가 태어나던 1736년 오늘의 노갈레스 근방 아리조나 목장근방 야샨 자락에서 원주민의 발길에 엄청 큰 은괴가 발견되었다. 이같은 소문은 화살보다 빠르게 인근 마을을 지나 근처에 퍼졌다. 한 밑천 잡으려 구름처럼 사람들리 모여들자 수습책으로 프런테라스 요새사령관견 재판을 주재할 수있는 시장직까지 가진 디 안자가 병사들을 이끄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멕시코 시티에서 금괴의 소유주가 확정될 때까지 디 안자는 은괴 출토지역을 보호하고 또 임의로 소유한 은괴를 압수하여 보호해야했다. 마침 인근에는 디 안자의 절친이며 지역 민병대 대장인 베르나르도 디 우레아 (Bernardo de Urrea)의 아리조나 목장이 있었다. 디 안자는 우레아의 목장에 머물면서 이곳에 몰려든 노다지꾼들의 은괴 소동을 진압하고 소유권문제를 취급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