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사슴 사냥하다 대원이 발견한 '샌프란시스코' 만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산디에이고에 선교원과 수비대를 세우다
캘리포니아 초대 총독겸 군사령관에 임명된 포톨라는 1769년 3월 9일 육상 탐험대를 지휘하여 육로를 통해 바하캘리포니아를 떠나 산디에이고로 향했다. 이중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다수의 바하캘리포니아 원주민도 합류했다. 해상 탐험대는 이보다 앞선 1월과 2월 두차례에 걸쳐 뱃길로 산디에이고로 향했다. 그러나 해상 탐험대원과 정착민을 실은 두척의 배는 심한 바다폭풍으로 예상보다 늦은 1769년 4월 산디에이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탑승자 대부분은 심한 배멀미와 괴혈병으로 초죽음이 되었다. 육상과 해상 탐험대는 1769년 6월 산디에이고에서 합류했다. 포톨라 총독은 제2의 정착촌과 요새를 세우기위해 7월 14일 근 440마일 거리의 몬트레이만을 향해 육상으로 출발했다. 몬트레이로 향한 육상 탐험대는 탐험중 필요한 양식과 장비를 노새에 싣고 출발했다. 그리고 해상 탐험대를 실은 선박은 대원을 운송한 후 계속해서 양식을 몬트레이 만에 운송하기로 했다. 몬트레이 만에 요새와 선교원 그리고 정착촌을 세우기위해 출발한 포톨라의 탐험대는 캘리포니아에서는 유럽인으로서 최초의 탐험대이다.
탐험에 참여한 공병장교 미구엘 꼬스탄스(Miguel Costans)와 프란시스코 교단의 후앙 크레스피 (Juan Crespi) 신부는 탐험의 전과정과 탐험 중 보아온 주변 풍경과 접촉한 원주민 생활을 세세히 기록했다.
몬트레이 만에 육상과 해상 탐험대 파견
포톨라의 육상 탐험대는 산디에이고 만을 출발한 지 75일만인 9월 30일 몬트레이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몬트레이 만에는 근 150여년전 항해사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천혜의 요새터는 찾을 수 없었다. 비즈카이노는 몬트레이 만에는 ‘0’자 모양의 만이 있고 이곳은 요새를 세울 수있는 천혜의 장소라고 극찬했다. 포톨라는 갈베스 장군이 언급한 요새의 위치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어 전 대원을 이끌고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곳과 이미 도착했을 보급선을 찾아 연안을 끼고 다시 북상했다.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천혜의 요새’를 찾는 포톨라와 대원들의 발걸음은 오랜기간 도보여행에 지쳐 무척 더디었다. 어느새 절기는 여름이 가고 한기를 느낄만큼 차가운 가을이 깊었다.
요새 부지를 찾던 육상탐험대, 거대한 ‘SF 만’을 발견
10월 말 경 포톨라 일행은 오늘의 샌 프란시스코 만 근처에 도착했다. 10월 31일 대원중 일부가 오늘의 산브루노 (San Bruno)서쪽에 솟은 해발 580미터의 몬타라 산 서쪽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정상에서 70여 마일 거리의 서쪽방향에 짙은 바다 안개에 잠겨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만을 보았다. 그리고 만 주위에는 외롭게 떠있는 파라요네스 (Farallones) 섬과 오늘날 포인트 레이스(Pint Reyes) 근방의 드레이크 만 또는 샌프란시스코 체르메오 만 (Cermeos Bahia de San Francisco)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열린 이래 외지인에게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거대한 만은 몬트레이 만에 세울 알맞은 요새터를 찾아 떠돌던 육상 탐험대에 의해 그 웅장한 실체가 드러났다. 드레이크 만을 조망한 포톨라의 대원들은 이곳이 몬트레이 만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이같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포톨라 총독은 부하 호세 오르테가를 현지에 보내 의문을 풀기로 했다. 11월 1일 포톨라의 대원 중 일부가 바닥난 양식을 보충하려 근처 스위니 산 봉우리 (Sweeney Ridge)에 올랐다. 이들은 산봉우리에 올라 함선이 정박할 수 있는 거대한 만을 볼 수 있었다. 바닷물이 출렁이는 거대한 만을 바라본 크레스피 신부는 “이곳은 하느님을 모시는 스페인 제국의 해군함선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로 개발할 수 있는 알맞은 만일뿐만 아니라 비상시 전 유럽인의 피난처로도 훌륭한 곳”이라고 극찬했다. 11월 2일 사냥나갔던 대원들은 만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 날 탐험대의 호세 오르테가 병장은 사냥 나갔던 대원들이 보았다는 거대한 만을 확인하기위해 스위니 산봉우리에 올랐다. 또한 일부 대원들은 드레이크 만으로 알려진 포인트 레이스에 이르러 오늘의 골든 게이트 (Golen Gate)인 해협을 통해 태평양 바닷물이 흘러들어 형성된 거대한 만을 확인했다. 11월 4일 포톨라의 전 대원은 스위니 산을 지나 70여마일 거리에 있는 거대한 만을 확인했다.
우연한 사고처럼 발견된 샌프란시스코 만
실제 뉴스페인 제국의 항해사들은 샌프란시스코 만이 발견된 1769년보다 근 200여년 전부터 캘리포니아 연안을 탐사했으나 그 누구도 오늘의 샌프란시스코 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말 우연히 사고처럼 포톨라 총독이 지휘하는 육상 탐험대가 샌프란시스코 만을 발견했다. 발견 당시 포톨라 총독과 대원들은 자신들이 유럽인 최초로 샌프란시스코만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후 전 대원은 캘리포니아 만의 포인트 레이스 일대의 캘리포니아 만에 인접한 샌프란시스코만의 거대한 내륙을 실제 육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포톨라의 샌프란시스코 만 발견 이후 얼마동안 뉴스페인 당국자들은 샌프란시스코 만이 몬트레이 만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스페인 당국자들은 샌프란시스코 만이 몬트레이 만보다 더 규모가 크고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난 후 샌프란시스코 만과 몬트레이 만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제2차 몬트레이 탐험대 출발하다
1602년 탐험가 비즈카이노가 극찬한 천혜의 요새찾기에 실패한 포톨라 총독은 양식이 충분히 확보되자 다시 “0”자 모형의 요새 부지를 찾아 군화끈을 다시한번 단단히 조였다. 포톨라는 육상과 해상으로 2개의 탐험대를 꾸렸다. 해상 탐험대는 세라 신부를 비롯하여 공병장교겸 지도제작자인 미구엘 코스타노 (Miguel Costano)와 군의관 페드로 프라트 (Pedro Prat)가 동승했다. 그리고 몬트레이 수비대가 세웠을 경우를 감안하여 양식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해상 탐험대를 실은 산안토니아 호는 1770년 4월 16일 출항했다. 포톨라 총독이 지휘하는 육상 탐험대에는 페드로 페이즈 (Psero Fages)중위를 비롯하여 스페인 출신 12명의 지원자와 병사 7명, 그리고 바하캘리포니아 출신 원주민 5명, 2명의 노새몰이꾼과 종군 사제 후앙 크레스피가 참가했다. 많은 장비와 양식을 가득 등에 진 노새도 묵묵히 길을 나섰다. 일행은 지난 겨울, 산디에이고로 돌아왔던 길을 더듬어 다시 몬트레이만으로 향했다. 산디에이고를 떠난 지 36일동안 단 2일만 휴식을 취한 포톨라의 육상 탐험대는 1700년 5월 24일 포톨라가 지난해 2번째 세웠던 십자가 인근에 도착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