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아리조나'지명을 전 미국에 알린 '디 안자'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식수를 찾아 주린 배를 안고 떠도는 원주민들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럽산 곡물과 과일나무, 야채 등을 보급하며 하느님 말씀을 전하자 원주민들의 삶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일부 고집스런 원주민들은 외지인 선교사들에게 반항하는 가하면 강제 노역시에는 태업을 일삼고 무기를 들고 저항했다. 이때마다 선교원에 주둔중인 병사들은 무력으로 이들을 제압했다. 특히 1734년부터 근 3년간 페리쿠 부족들은 무기를 들고 선교원 측에 저항했다.
선교원 측의 배려로 바하 원주민들의 생활은 많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선교원을 따라 유럽의 많은 정착민들이 바하캘리포니아 반도를 찾자 면역력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은 외지인과 함께 들어온 천연두나 홍역, 그리고 발진 지부스에 속절없이 죽어갔다. 이러한 전염병은 선교원측이 좁은 공간에 대량으로 환자를 수용하면서 피해는 더욱 컸다. 1762년에는 6만여 명이던 원주민은 급속히 감소하여 1800년경에는 고작 5,900명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전통문화도 쿠메이에와 코코파, 그리고 파이파이 부족을 제외한 타부족들의 문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길게 늘어선 바하 반도는 1534년 스페인 항해사 포튠 히메네즈 디 베르타돈나(Fortune Jimenez de Bertadona)가 발견하고 뉴스페인측에 알렸다. 그해 5월 뉴스페인의 실권자 헤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바하 반도를 통해 일명 코르테스 만이라는 캘리포니아 만을 탐험하고 바하 반도는 캘리포니아라고 불리는 섬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코르테스는 바하 반도의 라파즈에 정착촌을 건설하려 했으나 보급품 조달이 원활하지않아 1년만에 철수했다. 그리고 근 150여 년간 바하캘리포니아를 찾는 외지인은 없었다. 1683년 1월 뉴스페인 당국의 후원으로 시나로아 총독 안티욘(Isidoro de Atondo y Antillon)은 배 3척에 200여명의 정착민을 태우고 바하캘리포니아의 최남단 라파즈에 정착했다. 에우제비오 키노 예수회 신부도 동행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안티욘과 키노 신부는 라파즈에서 223마일 거리의 로레토 부근 산브루노에 정착하고 선교원을 세웠다. 그러나 기다리던 보급선은 좀체 도착하지 않았다. 또한 일부 원주민들의 강한 저항으로 안티욘과 키노 신부는 정착촌과 선교원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키노 신부 “캘리포니아는 섬이 아니다”
바하 캘리포니아의 선교원을 포기한 키노 신부는 이후 피메리아 알타와 오늘의 멕시코 일부와 아리조나 남부의 소노라 일대에 선교원을 세웠다. 키노 신부는 뗏목을 타고 콜로라도 강을 건너 퀘찬 부족의 땅인 유마에 안착했다. 그는 알타캘리포니아가 섬이 아닌 대륙의 일부임을 유럽에 알렸다. 콜로라도 강을 건너 바하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키노 신부는 1697년 10월 19일 누에스타라 세뇨르 디 로레토 콘초(Nuestra Senore de Loreto Concho)라는 선교원을 세운 예수회 살바티에라 (Juan Maria de Salvatierra) 신부와 조우했다. 그 후 키노 신부는 보급품이 열악한 바하 선교원에 많은 곡물과 가축을 지원하여 원주민 선교를 도왔다. 이처럼 하느님 말씀을 전해들은 바하캘리포니아의 원주민들은 그 후 개스퍼 포톨라와 세라 신부의 산디에이고와 몬트레이만의 정착촌 건설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 제국의 육상을 통한 알타캘리포니아 진출은 소노라 사막 일대를 장악한 거친 아파치들의 저항으로 좀체 진전을 이루지못했다. 그러나 스페인 프론테라스 요새 사령관 디 안자 1세 (1693.6.29-1740.5.9 Juan Bautista de Anza 1)가 앞장서고 그리고 그의 아들 투박 요새 사령관 디 안자 2세가 1776년 샌프란시스코 만에 요새를 세우면서 이루어졌다. 당시 캘리포니아 일대에는 10만 명내지 30만명의 원주민이 살았다. 후파 부족은 캘리포니아의 남서부에, 마이우 족은 중부지역에, 포모 부족은 샌프란시스코 북부의 맨도시노, 소노마 일대에, 퀘찬 부족은 남부지역에 거주했다.
기마대 소위가 되어 사령관 딸과 결혼
디 안자 1세는 1693년 스페인 바스크 부족의 마을 헤르나니 (Hernani ) 마을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부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집안의 상속자로 큰 누나로 정하자 디 안자 1세는 19세가 되던 1612년 청운의 뜻을 품고 신천지 아메리카 대륙을 찾았다. 디 안자 1세는 어머니의 친척들이 모여사는 소노라 지역의 쿠리아칸 (Curiacan)으로 찾아들었다. 당시 바스크 족 언어를 사용하며 자란 디 안자 1세는 스페인어는 몇마디 인사말이 고작이었다. 디 안자 1세는 당시 은광개발이 한창이던 소노라의 알라모스 (Alamos)를 찾았다. 알라모스에서 은광개발에 참여하여 자본을 마련한 디 안자 1세는 1716년부터 1720년까지 오늘의 헤르모시요 (Hermosillo)와 아즈펙 등지를 오가며 은광개발에 참여하여 많은 돈을 모았다. 그 후 그는 소노라의 바소추, 산호세에서 광산권을 사들여 거금을 마련했다. 야망이 큰 디 안자 1세는 신천지에서는 군인의 길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군인이 되었다. 신천지에 들어선 지 9년만인 1721년 8월 그의 나이 28세 때 디 안자는 안토니오 베제라 니토 (Antonio Bezerra Nieto) 사령관이 지휘하는 치와와 지역의 야노스 (Janos) 수비대의 기마대에 입대하여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당시 그는 강인한 체력에 은빛의 흰 수염과 옅은 갈색머리를 휘날리는 미모의 젊은이였다. 강인한 체력에 미모, 그리고 총명한 디 안자는 얼마후 니토 사령관의 딸인 마리아 로사 베제라 니토 (Maria Rosa Bezerra Nieto)와 결혼하고 또 중위로 진급했다.
프론테라스 요새 사령관이 되다
그 무렵 프론테라스 주둔 요새 사령관 그레고리오 알바레스 투논 퀴로스 (Gregoroio Alvares Tunon y Quiros) 사령관은 소노라 일대의 유지들과 부정에 연루되어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법정에 서기위해 멕시코로 소환되었다. 디 안자는 대위로 승진하면서 1726년 11월 프론테라스 요새 사령관에 취임했다. 사령관에 임명된 디 안자는 요새를 정비하고 아파치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산루이스 (San Luis)와 산타크루즈 (Santa Cruze) 강 상류에 병사들을 주둔시켜 아파치들의 공격에 대비하자 이 지역에는 자연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디 안자는 아리조나 남부지역인 구에바비와 산마테오, 시쿠리스타 (Sicurisuta) 지역에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목장을 개설했다. 디 안자는 요새사령관으로 병사들을 지휘하여 아파치로부터 정착민을 보호하면서 프론테라스 지역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시장직도 겸했다. 요새 사령관으로서는 용감하고 전주민에 자애로운 시장겸 재판관인 디 안자 1세는 온 주민의 존경을 받았다. 디 안자는 또한 6자녀의 아버지로서 집안에서는 자애로운 가장이었다.
디 안자 1세는 아리조나라는 지명을 처음으로 뉴스페인을 비롯한 전 북미 대륙에 알렸다. 마침 피멜리아 알타와 오포데피의 산 호세프 (San Joseph de Opodepe) 마을에는 시나로아에서 태어난 바스크 부족 후손 베르나르도 디 우레아라가 지역의 준 사법관이며 민병대 대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지역을 지켰다. 그리고 프론테라스 요새 사령관 디 안자와 깊은 교류를 가졌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