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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10주만에 '악마의 길' 지나 LA 도착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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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1월 19일 수요일부터 21일 금요일까지 (출발 12일부터 14일까지)
250마일 ‘악마의 길’에 들어서다
카보르카에서 2일을 보냈다. 이곳에서 부터 장장  250마일의 ‘악마의 길’이 시작된다. 계곡 중앙에는 은광과 금광이 가동 중으로 약 90여가구가 모여살았다. 그리고 십자로가 대로와 연결되어 남쪽과 알타계곡으로 연결되었다. 극소수 여행객들이 희미한 흔적을 따라 피마 사막을 가로질러 콜로라도 강으로 향했을 것이다. 카보르카는 탐험대가 말과 보급품을 조달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다. 마침 우레아가 디 안자에게 노새 2줄을 주었다. 그러나 노새는 3마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시원치않았다. 마침 몰이꾼이 노새의 말굽을 구하러 시내로 나가 탐험대는 몰이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1774년 1월 23일 토요일 (출발 탐험 15일째)
카보르카는 스페인 수비비대가 있는 마지막 요새였다. 디 안자는 말이나 부식이 모자란다해도 산가브리엘에 도착할 때까지 구할 곳이 없었다. 
가르세 신부는 이렇게 기록했다. 산가브리엘 선교원까지는 북서쪽으로 근 500마일 거리이다. 일찌기 탐험한 가르세 신부조차 목적지인 산가브리엘까지 가는 길 절반 정도만 알 뿐이다. 가르세 신부는 2년전 콜로라도 강까지 여행하여 유마인을 만나고 특히 추장 팔마 (Palma)와 교분을 텄다.
팔마 추장은 누구나 존경할만큼 여유로운 인품의 소유자일 뿐아니라 영리했다. 그는 신부를 존경할 줄 알았고 철학적인 면에서도 이해력이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대면했을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라온 문화와 언어의 장벽이 있었으나 가르세 신부와 팔마 추장은 몸짓으로 충분히 서로의 의사를 소통했다. 가르세 신부는 한편에는 성모 마리아와 막 태어난 예수님 상을 그린 기다란 천을 가지고다니며 만나는 유마인들을 전교했다. 팔마 추장은 담배는 나누어 피지않고 유리구슬은 나누어주지 못하지만 머리에 호기심을 가득 찬 방랑자 가르세 신부에게 매료되었다. 당시 유마인들은 콜로라도 강변에 잠입한 백인들로부터 멀리 스페인이라는 제국이 존재하고 태평양 연안 가까이까지 와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영리한 팔마추장은 이처럼 강대한 외부 세력과 사제를 어떻게 대해야하는것도 알았다. 그래서 팔마 추장은 죽음 직전의 세바스티안 타라발의 목숨을 구한 뒤 스페인측에 넘겼다.

1774년 1월23일 일요일부터 1월24일까지 (출발 16일부터 17일)
콜로라도강에서부터 힐라 강과 캘리포니아 만 일대는 무척 건조했다. 사람이나 가축, 동물이 마실 물은 비록 우기인데도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가축이나 말같은 동물의 주식인 풀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산아일디폰소 (San Ildefonso )를 뒤로하고 디 안자는 북서쪽으로 24마일가량 전진했다. 그곳은 24개의 원주민 마을이나 이동 주거지가 란체리아가 있는 사막속의 우물물이 가차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작은 우물’이라는 뜻의 아리바이피아 (Aribaipia)라고 불리우는 파파고 원주민 마을이다. 한때 예수회가 자리했던 이곳을 디 안자는 산에두아르도 (San Eduardo)라고 불렀다. 다음날 일행은 최근 내린 비로 넉넉하게 물이 고여있는 산후앙 디 라마타 (San Juan de la Mata)를 찾았다. 마침 물을 찾아 이동한 파파고 원주민 4가구를 만났다. 이들은 물이 고갈될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고 했다. 

1774년 1월 27일 목요일부터 28일 금요일까지 (출발 20일부터 21일까지 )  
26일까지 2일간 탐험대는 시에라 두라주노 (Sierra Duraznod)와 라 에스푸마 (la Esapuma )의 서쪽 계곡을 휘돌아 퀴토박 (Quitobac)까지 33마일을 전진했다. 루이스 퀴토박(Luis Quitobac)은 뉴스페인의 선교사들이 일차 방문하고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이 이름을 사용하지않았다. 그러나 지역 촌장과 4가구 가족들이 탐험대원을 환영했다.
1월 27일부터 2일간 일행은 ‘악마의 길’ 42마일을 황야에 거칠게 솟아있는 산을 넘어 1752년 예수회 사제들이 선교원을 세웠던 산마르셀로 디 소노이탁 (San Marcelo de Sonoitac)까지 행진했다. 강행군이었다. 파파고 원주민의 반란 이후 스페인 출신 사제 1명과 원주민 출신 사제 2명이 순교한 이후 선교원은 비어있었다. 소노이탁에서 콜로라도 강까지 거리와 카보르카에서 소노아까지 는 거리가 같았다. 그러나 탐험대는 대부분 황량한 사막을 지나면서 더욱 애를 먹었다. 일찌기 사막을 가로질렀던 가르세 신부는 이 지역이 익숙해서인지 탐험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774년 1월 29일 토요일부터 2월 4일 금요일까지 (출발 22일째부터 28까지)
29일 엘 카리잘의 메마른 강줄기를 따라 27마일을 전진했다. 마실 물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주위에는 규모가 큰 목장이 있는지 물은 탁했다. 이후 다행히 식수를 찾았으나 물은 전 대원이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식수 조달을 위해 디 안자 사령관은 탐험대를 둘로 나누었다. 디 안자는 말 일부와 가축과 병사를 데리고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 탐험대는 칠명의 병사들과 짐실은 노새와 함께 현지에 남았다. 디 안자는 오후 엘 카리잘 (El Carrizal)을 출발하여 북북서방향으로 희미한 흔적이 남은 오솔길을 타고 산을 넘었다. 그리고 식수와 가축들이 뜯을 풀이 전혀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서 야영했다. 다음날 일행은 작은 모래 둔덕이 군데군데 보이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않는 죽음의 땅같은 바위투성이뿐인 황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높은 곳에 있는 물이라는 ‘High Water”라고 알려진 작은 저수지가 바위 틈에 있었다. 그곳은 손을 높이 뻗치거나 무릎을 굽은 후 뛰어올라야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 대원이 마시기에 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디  안자는 뒤따라 올 노새와 대원을 위해 물은 남겨두고 자신과 함께 온 선발대는 물을 소지하지 않은 채 다시 길을 나섰다. 디 안자와 선발대는 근 9마일을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말그대로 ‘악마의 길’이었다. 어둠이 밀려오자 물이 흐르지 않아 말라버린 강변에 야영장을 차렸다. 주위에는 그나마 엉성한  풀밭이 있어 그간 주렸던 말들은 게걸스럽게 풀을 뜯었다 
이틀 밤을 물없이 보냈다 갈증으로 전 대원은 신음했다. 그리고 제대로 전진할 수 없었다. 다행히 9마일을 바위투성이 언덕에 있는 구멍에 고인 물로 목을 추기면서 걸었다. 디 안자는 이곳을 라 퓨리피게이션 (La Purification )이라고 불렀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6개의 저수지에는 쉽게 다가갈 수 있어 말이나 가축이 갈증을 달랠 수 있었다. 물은 의외로 맑았다. 주변에는 가축들이 뜯을 수 있는 질좋은 풀들이 넉넉해 가축들은 배를 채울 수있었다. 대원들도 쉽게 저수지에 달려가 맘껏 물을 즐겼다. 마침 디 안자가 사슴과 크기가 비슷한 산양을 발견했다. 그러나 털은 거칠어 보였다. 파파고 원주민들은 물을 찾아오는 산양을 사냥한다고 했다. 디 안자도 이곳에서 탈진한 몸을 달래며 뒤따라오는 대원을 기다렸다. 수요일 노새무리가 ‘하이 워터’에 도착했다는소식을 알려왔다. 다음날 둘로 나뉘었던 탐험대는 다시 합쳤다. 그리고 서쪽을 향해 15마일을 행진하기 앞서 ‘중간 샘’인 포조 디 엔 메디오 (Pozo de en Medio) 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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