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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호르카시타스에서 투박으로 길을 나서다-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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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9월 29일부터 10월 21일까지
쿠리아칸에서 선발된 이주희망자들은 근 500여 마일 밖 홀로카시타스 (Horcasltas)에서 집결했다. 디 안자의 1차 탐험은 준비기간만 몇 년이 걸렸지만 제2차 탐험은 고작 14개월만에 이루어졌다. 그만큼 알타캘리포니를 둘러싼 유럽제국간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홀로카시타스에 도착하기 전 샌프란시스코 만 이주희망자와 그 가족은 선발장소인 인쿠리아칸을 출발하여 쿠리아칸에서 근 300여 마일 밖 푸에르테 (Le Fuerte)를 지났다. 일행은 온통 원주민들의 이동식 초막이 모여있는 초원을 지났다. 원주민들이 사는 모습은 시계가 멈춘 듯 1백여년 전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근방에는 사나운 아파치들의 발호가 여전했다. 디 안자는 14개월만에 근 300여명이 움직이는 제2차 탐험 준비를 끝냈다. 
1774년 10월 2일, 대위에서 중령으로 초고속 승진한 35세의 젊은 디 안자 사령관은 1774년 5월 알타캘리포니아의 산가브리엘까지 육상탐험을 성공리에 마친 후 스페인 황실의 오랜 숙원인 샌프란시스코 만 연안에 정착촌 건설을 준비했다. 당시 뉴스페인에 정착한 많은 스페인 바스크 인들이 탐험을 떠나는 디 안자를 조직적으로 후원했다. 디 안자는 부카렐리 뉴스페인 총독으로부터 1775년 9월 24일 탐험과 정착촌 건설 허가를 받았다. 당시 스페인 정착촌은 원주민 저항에 맞설 수 있는 젊고 패기있고 건강하고 용감한 가족이 있는 병사 위주로 선발했다. 육상으로 알타캘리포니아로 연결하는 길을 개척하고 제2차 탐험에 디 안자는 우선 32명의 이주회망자 병사와 그 가족을 쿠리아칸에서 선발했다. 그리고 쿠리아칸에서 근 500여마일 밖 호르카시타스 (Horcasitas)에서 집결한 다음 200여 마일거리의 투박수비대에서 최종 점검을 마친 탐험과 정착 희망자는 콜로라도 강을 건너 1천여 마일 밖 샌프란시스코 만에 수비대와 정착촌을 세울 계획이다.
호르카시타스 마을은 1749년 인근에 대규모 목장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 수비대가 들어서면서 점차 주위에는 목장을 중심으로 정착민이 늘어났다. 이 마을은 당시 뉴스페인 총독 후앙 프란시스코 디 구에메스 (Juan Francisco de Guemes)가 수비대를 세우면서 발전했다.  큐바와 뉴스페인 총독을 역임한 산 미구엘 디 호르카시타스 (1681-1766)를 기려 이름지었다.
쿠리아칸을 떠난 이주대는 190여 마일 거리의 야퀴이 (Yaquin) 인디안 마을 르 프에르트 (Le Fuerte)에 들어섰다. 이 마을의 나보호아 (Navojoa) 산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정착민이 늘어나고 스페인 행정관이 상주했다. 디 안자의 이주대는 이어 500여 마일 밖 호르카시타스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동행할 대원들과 가축, 화물을 실은 노새 등을 최종 점검한 후 호르카시타스에서 200마일 거리의 투박에 집결할 예정이었다. 이번 탐험에도 가르세 신부가 투마카코리 선교원 신부인 토마스 아이하츠 (Thomas Eixarch)와 함께 동행했다. 두 신부는 이주탐험대와 콜로라도 강까지 동행하고 콜로라도 강변에 남아 유마인을 전도할 예정이다. 이주대의 종군 사목은 스페인 카타로니아 태생의 페드로 폰트 (Pedro Font 1737-1781) 신부가 맡았다. 그는 탐험중 전 과정을 기록하는 기록관에 정식 임명되었다. 

1775년 9월 29일 금요일 오후 4시30분 출발. 
대원 300여 명, 노새 140마리 콜로라도 강으로 향하다
9월 29일 아침은 쌀쌀했다. 출발할 탐험대와 이주대는 병사 34명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모두 240명이었다. 총 지휘관 디 안자 중령을 비롯하여 종군 사목겸 기록관 페드로 폰트 신부와 콜로라도 강변의 유마 부족에게 전교할 가르세 신부와 아이하츠 신부가 함께 출발했다. 이어 부대장 중위 알페레즈 돈 호아친 모라가 (Alferez Don Joseph Joachin Moraga)와 탐험대를 경호한 후 투박으로 함께 복귀할 10명의 병사 등 28명의 병사들이 함께 출발했다. (*이 중에서 8명의 병사는 사령관과 중사에 의해 특정지역의 수비대에서 차출되었고 20명의 병사는 특정지역의 알칼디아에서 디 안자가 모집했다)
240명의 대원중 병사들의 부인과 여인, 그리고 어린이는 136명, 그리고 민간인 이주회망자는 4명, 5명의 원주민 통역 (피마, 유마, 카후엔치 부족언어와, 니폴라 부족 등 5개 부족 언어 전담통역), 물품관리인 1명으로 2차 탐험에 동행한 인원은 모두 300여 명에 달했다. 그 외에 양식과 화기, 그리고 전 대원의 개인 화물, 탐험에 필요한 물품, 황제의 이름으로 원주민에게 줄 선물을 실은 140마리의 노새 (이중 25마리의 노새는 이주 희망자 소유) 그리고 340개의 말안장 (이중 220개는 탐험대 소유, 120개의 말안장은 이주희망자 소유이다) 그리고 함께 떠날 302 마리의 식용 소는 대원들이 탐험 중 하루 1마리씩 도축해 먹을 양식이었다. 탐험대가 출발하기 전 가장 고심한 것은 어떤 물품은 버리고 무슨 물품은 가져가야 하는 문제였다. 대원들에게 소지했던 물품은 어느 것이나 요긴한 것이었다. 이들은 포장했던 물품을 실었다가 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어른들이 짐을 포장하고 풀기를 반복하는 사이 병사의 부인들은 사라진 어린 아이를 찾아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너른 광장사이를 달렸다. 
9월 29일 금요일 오후 4시30분이 되자 디 안자 총사령관은 오른팔을 높이 들어 출발신호를 보냈다. 이어 긴 줄로 늘어선 탐험대는 미지의 땅 알타캘리포니아를 향해 역사적인 발걸음을 떼었다. 정착민을 따라 갈아탈 말 450마리, 그리고 양식과 일용품, 화기, 여유분의 말안장을 실은 노새가 천천히 뒤따랐다. 그 뒤로 302 여 마리의 식용소를 모는 목동들의 고함소리가 지는 햇살사이를 비집고 너른 벌판을 지났다. 드디어 이주대가 출발하는 엄청난 규모의 이주희망 탐험대는 호르카시타스를 떠나 소노라를 거쳐 195 마일 거리의 투박을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이처럼 느리게 전진한 이주대는 1시간 반가량 전진했다. 벌써 소노라의 9월 햇살은 짧았다. 디 안자는 전 대원에게 야영준비를 명했다. 수행한 시종들은 기마병을 위한 병사용 텐트 13개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주대원들이 지낼 텐트 10개가 세워졌다. 전 대원은 서둘러 화톳불을 피우고 요리할 소를 도축했다. 그사이 일부 대원은 쵸코레이트 물을 끓일 솥과 프라이팬을 내려 밀가루 토티야를 굽고 마실 초코레이트 음료를 끓였다. 디 안자는 호르카시타스 출발에 앞서 투박수비대가 보유한 500여 마리의 말을 아파치들이 약탈해갔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계절상 디안자의 이주대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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