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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원 목사 알수록 재미있는 성경 나눔] 타고난 최고의 싸움꾼 야곱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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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곳에 머물렀던 야곱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쳤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은 곳이다. 야곱은 그 땅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구입한 뒤 제단을 쌓았다. 그러나 그곳은 제단을 쌓아야할 올바른 장소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제단이 아니라 단순히 고향에 무사히 돌아왔음을 표시하기 위한 기념물로 보인다. 그는 이 제단을 ‘엘 벧엘’이 아니라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벧엘의 하나님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야곱 자신의 새 이름을 지칭한다. 그는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창28장). 그리고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밤새 씨름했다(창32장). 그는 옛이름인 야곱에서 벗어나 새이름인 이스라엘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가 벧엘에서 맹세한 것처럼 그의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력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이셨다. 가나안으로 돌아온 야곱은 인생의 긴 여정을 멈추고 편안한 쉼을 갖기를 원했고 모든 일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고 환상이었다. 그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서서히 변화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야곱에 머물러있었다. 양보와 타협에 능숙하고 계산이 빠른 그는 세겜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사는 게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딸 디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가족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게 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는 영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만약 그가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았다면 이 비극적인 사건을 모면했을 지 모른다. 

레아의 딸 디나가 혼자 외출했다가 현지인에게 강간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온두라스에 선교를 다니는 목사님의 전언에 따르면 치안이 매우 불안하고 총기사고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여행객이 혼자 외출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고 한다. 혼자 외출했다가 돈이나 귀금속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현지인을 대동하고 여럿이 함께 다녀야 한다고 조언했다. 디나는 그 땅의 딸들을 보기 위해 나갔다. 틴에이저인 그녀는 호기심이 많아 그 지역에 사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야곱은 사전에 주의를 주고 혼자 외출하는 것을 금하는 조치를 했어야 했다. 그녀가 외출했을 때 야곱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남의 집에 일어난 불 구경하듯 뒷짐을 지고 침묵했다. 남도 아니고 자기 딸이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어떻게 보고 만 있을 수 있나? 그의 소극적인 대응과 무책임한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했다. 그가 집안을 대표하는 지도자라면 사건의 경위를 듣고 가족회의를 소집하여 적절한 대책을 논의한 뒤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 도시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아들인 세겜이 그녀를 보자 음욕을 이기지 못해 성폭행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는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의 아버지 하몰이 결혼을 청하기 위해 야곱의 집을 방문했다.

결혼은 성폭행을 당한 여자를 위한 적절한 보상책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마치 하자있는 물건처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혼자 외롭게 사는 것보다 결혼하여 함께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몰은 결혼을 청하며 신부 값을 지불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기름진 땅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하몰과 세겜의 태도는 생각보다 진지하고 겸손했다. 그들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신부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태세였다. 과연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는 불변의 원칙인가? 만약 이방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한가족이 된다면 결혼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를 놓쳤다. 야곱이 처음 그 사건을 들었을 때 그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고 들판에서 양을 키우는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그의 아들들은 침묵을 지키는 야곱과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격노했다. 다윗은 암몬이 누이 다말을 범하여 욕되게 하였을 때 심하게 분노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분노했지만 보복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를 꺼린 것일까? 이에 격분한 압살롬은 암몬뿐만 아니라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는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 정의라는 이름아래 행해진 극단적인 증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복수였다. 정의는 무엇인가? 만약 잘못에 대한 응징이 없다면 정의가 세워질 수가 없다. 그러나 가혹하고 무서운 응징은 또 다른 폭력과 복수를 부를 것이다. 응징과 관용 사이에서 정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정기원 목사 (602) 804-3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