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선교원이 불타고 있다 디 안자, 폭동으로 탐험 일정 지체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1775년 11월 4일 자정 무렵, 유난히 둥근 달에 희색빛 구름이 스쳤다. 이제는 마른 강바닥은 선교원에 이르는 3마일 거리의 모래길이 되어버렸다. 야트막한 야산의 산 그림자는 버섯처럼 돋아난 원주민 초옥을 구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멀리서 유난히 시끄럽던 개 짖는 소리는 어느새 북소리에 잦아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성은 고요한 한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붉고 시끄러운 함성소리는 선교원에 가까워질수록 더 요란스러웠다. 발자국 소리와 북소리는 산천을 울렸다. 이제 원주민의 분노와 증오는 선교원을 불태우는 붉은 화마가 되어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루이스 하이메(*Luis Jayme: 1740.10.18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태어나 1775년 11월 5일 산디에이고 선교원에서 순교) 신부는 시끄러운 북소리와 함성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매캐한 연기는 벌써 선교원과 연이은 자그마한 침실까지 가득 찼다. 35세의 젊은 하이메 신부는 어둠과 연기가 가득한 침실을 더듬어 현관문을 향해 몸을 옮겼다. 원주민들의 함성은 점점 드세지고 지붕의 나뭇가지와 갈대가 타는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원주민들이 밀려들었다. 이 중 몇 명은 하이메 신부를 향해 돌화살을 연거푸 날렸다. 순간 하이메 신부가 비명을 지르며 차가운 마루바닥에 몸을 굽혔다. 흥분한 원주민들은 계속 하이메 신부를 향해 날카로운 돌 화살촉을 매단 화살을 날렸다. 폭도로 변신한 원주민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하이메 신부를 뒤에서 결박했다. 그리고 폭도들이 환호하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선교원은 불타고 목수, 대장장이, 사환이 전사
달과 무수한 별과 구름을 가리던 나뭇가지와 갈대로 엮은 선교원의 지붕은 이제 붉은 화마가 되어 불탔다. 몇몇 원주민들은 선교원에 밀려들어 귀중한 성물과 사제들의 제의 등 물품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그리고 선교원 내에 있는 양식창고로 몰려가 욕심껏 끌어안고 기쁨의 환성을 지르면서 광분했다.
한편, 아직도 잠에 취한 상등병과 일반 병사 3명 등 4명의 수비병은 수비병 막사의 건물 벽에 기대어 폭도들을 향해 화승총을 난사했다. 선교원에 기숙하던 목수 유서리노(Urselino)와 대장장이 호세 아로요(Jose Arroyo)도 폭도들을 향해 화승총으로 맞섰다. 그러나 얼마 후 두 사람이 응사하던 곳에서는 더 이상 화승총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들이 몸을 기대고 응사하던 막사의 벽에는 무수한 화살이 박혀 있었다.
빈센트 푸스터(Vincent Fuster) 선임 신부는 폭도로 변신한 600여 명의 쿠메이야(Kumeyaay) 원주민들이 불을 지르고 난입하자 크게 당황했다. 그는 침실의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호신용 권총을 빼어들고 폭도들과 맞섰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푸스터 신부는 선교원 건물 벽에 몸을 밀착한 채 한 발 한 발 탈출로를 찾아 막사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 폭도들을 향해 화승총을 난사하는 병사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소리쳤다. 그러나 병사들의 대답 대신 폭도들의 무수한 화살이 푸스터 신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푸스터 신부는 수비대로 향해 한 발 한 발 길을 찾았다.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하이메 신부
선교원 영내에서 무리 지어 거주하는 갓 영세한 신참 신자들의 안내를 받아서인지 폭도들은 쉽게 선교원과 연이은 식량 창고며 물품 창고를 쉽게 발견한 후 약탈했다. 계속되는 혼돈 속에서 선교원 일을 돌보던 원주민 2명도 살해되었다. 그리고 많은 양식을 약탈한 폭도들은 환호를 올리며 퇴각했다. 점차 함성이 잦아드는 사이 새벽 미명이 몰려왔다. 나뭇가지와 갈대로 덮은 선교원 지붕은 계속 불타고 선교원 내부도 붉은 화마와 연기로 가득했다. 날이 밝자 폭도들에게 화살을 맞은 채 끌려나간 하이메 신부는 6일 오전 산디에이고 마른 강바닥의 자갈밭 사이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돌로 짓이겨진 채 13발의 돌화살을 전신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폭도들과 맞섰던 대장장이와 목수, 그리고 선교원의 원주민 사환 2명이 사망했다.
1769년 개스퍼 포톨라(Gasper Portola) 알타 캘리포니아 총독과 프란시스코 교단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에 의해 세워진 산디에이고 수비대와 선교원은 쿠메이야 원주민들의 환영 속에 설립되었다. 25개 부락에 3천여 명의 원주민들은 산디에이고 강을 끼고 옥수수와 콩 그리고 갖은 야채와 수박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이들 원주민들은 정착보다는 들짐승처럼 산과 들을 떠돌기를 즐겼다. 곡식을 재배하면서 도토리알을 줍거나 각종 식물의 씨앗, 선인장 열매를 주워 양식을 보탰다.
무단으로 점령지 늘리자 분개한 원주민들
어느 날 갑자기 바람결에 소문으로만 듣던 이방인들이 산디에이고 강 주변에 나타났다. 이들은 원주민들의 영토 안인 산디에이고 강 주변에서 살겠다고 청했다. 쿠메이야(Kumeyaay) 부족 원로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이들을 환영했다. 이방인과 가까이 어울려 살면 자연스레 물품 교환이 용이해 부족의 삶이 윤택해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는 얼마 후 착각으로 밝혀졌다. 산디에이고 강 주변에 터를 잡은 이방인들은 흙벽돌과 나무기둥, 나뭇가지, 마른 갈대로 작은 건물을 짓고 살았다. 얼마 후 이들은 인근 땅을 개간하고 옥수수와 밀, 야채를 가꾸었다. 그리고 너른 터에 울타리를 친 후 뿔이 돋은 젖소와 소, 양과 돼지 같은 가축을 키웠다. 그러나 해와 달이 바뀌면서 이들은 좀 더 양식이 필요하다며 쿠메이야 부족의 땅을 허락도 없이 점령한 후 농사를 지었다. 이방인들의 이 같은 행태에 온순한 쿠메이야 부족은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원주민의 오랜 정신적인 지배자 주술사들과 맞서게 되었다. 이들이 정착한 지 2~3년간 산디에이고 선교원은 쿠메이야 원주민에 대한 전교에 그리 힘을 쏟지 않았다. 1773년까지 하느님께 인도한 원주민은 한 해에 고작 100여 명 안팍이었다.
영세자 늘어나자 주술사와 마찰
1774년 6월, 산디에이고 선교원은 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산디에이고 강에서 3마일, 바다에서 6마일 떨어진 쿠메이야 부락 근처로 이전했다. 원주민 부락과의 접촉이 용이해지면서 선교원의 전교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하이메 신부와 푸스터 신부가 부임하면서 두 사제의 전교 사업은 눈에 띄게 활기를 띠었다. 1775년 7월부터 9월 사이에는 추장 콰이파이(Kwaipai)를 비롯해 400여 명의 원주민이 하느님의 품을 찾았고, 1775년 말까지는 약 400여 명이 추가로 개종할 예정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로 개종한 원주민이 늘어나자, 수천 년 동안 원주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주술사들의 심기는 점점 불편해졌다. 원주민들의 개종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그들의 분노는 자연스레 선교원을 향했다. 각 마을에 흩어져 있던 주술사들은 부족의 영토를 임의로 점령하는 이방인들을 저주하고, 그들을 영토를 무단 침범한 적이라며 주민들을 선동했다.
원주민들은 선교원 영내에 거주하며 3개월 동안 십자성호를 긋는 법과 간단한 기도, 미사에 참석하는 과정을 거치면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영세를 받은 이들은 해 뜰 무렵 기상해 사제의 주도로 성가를 부르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성가와 기도를 바친 이들은 옥수수·보리·콩 등으로 요리한 죽인 ‘포졸(Pozole)’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사제가 정해준 일터로 향했다.
정오까지 농장이나 목장에서 옥수수·밀·보리 등을 가꾸고 가축을 돌보았으며, 일부 영세자나 비영세자도 동일한 작업에 참여했다. 또 일부 원주민은 흙벽돌을 만드는 등 다양한 작업에 동원되었다. 정오가 되면 선교원 측이 마련한 돼지고기나 쇠고기, 양고기를 넣은 옥수수·밀·보리 죽인 ‘포리지(Porridge)’를 먹고, 다시 해질 때까지 작업장에서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비영세자는 부락에서 제공하는 육류가 빠진 포리지로 식사해야 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