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원 목사 알수록 재미있는 성경 나눔] 로마서 – 깊게 천천히 오래 보기 4

필자는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랐지만 깊은 신앙심은 없었다. 군대를 전역한 뒤 만난 친구가 물었다. “너는 하나님을 만났거나 영적인 체험을 한적이 있어? 만약 그런 체험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믿어?” 아무 생각이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나에게 그 질문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 부모가 교회를 다니니까 따라서 다녔을뿐 그건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짐을 꾸리고 경기도 의정부에서 한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면 ‘비암리’라는 동네가 나오는데 맞은편 산 꼭대기에 있는 작은 기도처를 찾아갔다.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고 해서 2주일동안 목이 쉬도록 열심히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래도 난 안되나 싶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서 잠이 오지않아 며칠 밤을 설친 뒤 이대로 포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집을 나섰다. 그곳에서 한달을 머물며 기도하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보통 10분 정도 기도하면 더 이상 기도할 내용이 없어 눈을 뜨곤 했는데 그 날은 몇시간을 기도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일찍 저녁을 먹고 낭떠러지 위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오늘 하나님이 나를 안 만나주시면 바위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한참 기도하던 중 갑자기 혀가 굳어지고 방언이 터져 나왔다. 눈부시게 강한 빛이 몸을 에워싸고 마치 구름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눈을 떴을 때 나는 새로운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바울은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자 그는 눈을 뜨지 못하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는 물음에 답하신 대신 “주님, 누구십니까?”라고 반문했다. 범상치 않은 목소리를 알아챈 그는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를 둘러싼 빛은 해와 달의 빛이 아니라 ‘셰키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 생명의 빛이었다. 이어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바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이다. 그는 ‘사울’로 불렸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라틴어 이름인 ‘바울’로 불리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 사울(Saul)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Paul)은 ‘작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예수를 믿고 나서 스스로 큰 자에서 작은 자가 되었을까? SNS에서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증언하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적은 있지만 믿을 수가 없어 무시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충격적인 사건이 그에게 일어났다. 백문이 불여일견,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독불장군으로 행동하게 했던 그의 고질병 같은 아집과 독선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그에게 떨어졌다. 그는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일어난 일은 꿈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거나(행9:7)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행22:9).
그는 눈이 멀어 3일동안 어두움에 갇혀 지내는 극심한 고통 속에 갇혀 있었다. 그가 이 기간동안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 않았다. 전심으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어둡고 부끄러운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비록 눈을 떴지만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는 깊은 깨달음에 전율했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펄쩍 들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절로 노래가 나왔다. 깨어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눈 뜬 맹인으로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맹인의 눈을 고쳐 주시자 이를 문제 삼는 바리인들에게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셨다. 차라리 맹인으로 태어난 게 더 나았을 것 같다는 말씀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자신의 벌거벗은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각 예수님을 따라간 것처럼 그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가 예수를 만난 사건은 그에게 새로운 미션이 부여된 거룩한 부르심(Calling)이었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통렬한 회심(conversion)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새롭게 변화되기를 갈망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화두’와 같은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변화(Change)이다.
정기원 목사 (602) 804-3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