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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선교원이 불타고 있다 디 안자, 폭동으로 탐험 일정 지체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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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부터 1월 19일 금요일까지 (호르… 출발 106일부터 113일까지)
몬터레이 수비대장 겸 알타 캘리포니아 총독 몬카다는 산디에이고 원주민 폭동이 일어난 지 2개월여가 지난 후 산디에이고에 나타났다. 산디에이고와 몬터레이 간은 445마일의 먼 거리였다. 폭동 소식이 몬터레이에 전달되는 데 그만큼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이 소식을 받고 총독이 현장에 도착하는 데에도 4주가 걸렸다. 몬카다 총독과 오르테가(Jose Francisco Ortega, 1734년 6월 20일 멕시코 체라야 출생, 1798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해변에서 사망) 중위는 조사 결과 선교원 수비병과 수비대 병사들은 폭동에 어떠한 책임이 없음을 확인했다.
오르테가 중위는 멕시코에서 태어났으나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나이 21세에 군인의 길에 들어선 오르테가는 사병으로 16년을 복무하고, 1771년 몬카다의 전임 수비대장 겸 총독 페드로 파헤스(Pedro Fages)에 의해 16년 만에 장교가 되었다. 이후 산디에이고 수비대장을 역임하던 중 사고사했다. 그는 포르톨라 총독을 수행하며 산디에이고 수비대와 몬터레이 수비대 건설에 공을 세웠고, 캘리포니아 지형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참군인이었다. 
디 안자가 산디에이고에 도착한 후, 그가 타고 온 말은 탈진 상태로 곧바로 작전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 자연히 디 안자와 그의 병사들은 당장 주모자 색출 작전에 나서지 못했다. 마침 최근 영세를 받은 원주민 2명이 폭동 주모자들과 새로 폭동을 모의하다 적발되었다. 1월 15일 디 안자는 이들에게 엄한 체벌을 내렸다. 그 결과 혐의자 한 명이 사망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한 명은 사제의 보살핌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혐의자는 사제의 온정을 외면한 채 자신의 고향으로 달아나 영원히 잠적했다. 이처럼 원주민의 저항이 끈질기자 산디에이고 선교원과 수비대는 충격에 빠졌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수비대는 강한 징벌을 주장하는 측과 관용을 베풀어 원주민과 화해하자는 측으로 갈렸다. 폰트 신부와 퓨스터 신부, 그리고 라우손과 아뮤리로 등은 사제들과 각각 의견을 달리했다. 이에 대해 몬카다 총독은 폭동을 원천적으로 제압하려면 강력한 징벌뿐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폭도에 대한 자비는 사치다”라고 주장했다. 산디에이고 수비대의 이러한 기류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시시각각 수비대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주모자의 정체가 좀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갓 개종한 신자들과 주술사를 추종하는 원주민들은 선교원과 수비대를 기웃거리며 주위를 정탐했다. 몬카다 사령관은 다시 한 번 주모자 색출을 엄하게 명령했다.
어느 날, 산디에이고 수비대 근방 야산에서 봉화불이 올랐다. 어둠을 이용해 15명의 병사들이 통역을 대동하고 조용히 수비대를 빠져나왔다. 이번 야간 작전은 몬카다 사령관만이 알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수비대 주위는 오직 침묵과 고요만이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했다. 당시 수비대 주변 해안에는 고래가 해변에 밀려왔다는 괴이한 소문이 퍼져 수비대와 원주민 부락은 뒤숭숭했다. 바다는 차가운 안개만 자욱했다. 이날 폰트 신부는 몸살로 며칠째 누워 있었다.
1월 19일 금요일, 주모자 색출에 나섰던 수색대가 폭동 혐의자 4명을 포박해 수비대로 들어섰다. 이들에게는 간단한 심문 후 50대의 채찍 형벌이 내려졌다. 4명의 혐의자 중 2명은 부락민을 이끌고 직접 폭동에 가담한 추장이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품을 찾았던 영세자였다. 영세명도 스페인 황제의 이름과 같은 ‘카를로스’, 다른 혐의자는 프란치스코 교단 설립자의 이름인 ‘프란치스코’였다.

1월 20일 토요일부터 1월 25일 목요일까지 (호르… 출발 114일부터 119일까지)
20일 토요일, 디 안자 사령관은 직접 수감자를 심문했다. 마침 몬카다 총독은 디 안자가 수집한 정보를 근거로 폭동 가담자와 무혐의자를 가려냈다. 무혐의자는 즉시 석방하여 이들의 출신 마을 원주민들과의 불화를 피하고, 되도록이면 화해를 회복하려 했다. 몬카다 총독은 주민들에게 “이를 거부할 경우 결국 파멸만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디 안자는 총독의 이 같은 발표를 “원주민 중 불안을 조성하는 자는 무력으로 즉각 응징하고, 주모자를 은닉하거나 주모자에 대한 진술을 거부할 경우 군대로 하여금 응징하겠다”는 경고로 해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디에이고 거주 약 3천여 명의 쿠메이야 원주민들은 쉽게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산디에이고의 1월 날씨는 차가웠고 궂은 비는 계속 내렸다. 원주민 폭도들과 수비대 사이에는 긴장한 상태로 시간이 강물처럼 흘렀다.
부슬비가 촉촉이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저녁 무렵, 야트막한 야산에는 낯게 드리운 구름과 안개가 자욱했다. 
어느 정도 쿠메이야 주민의 폭동이 진정되자, 디 안자 사령관은 자신이 부여받은 샌프란시스코만 일대 탐험을 완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몬카다 총독에게 “1월 중 아직 완성하지 못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발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는 이어 “산디에이고의 폭동이 황실의 명령을 집행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또 디 안자는 “나의 병사 중 10명은 산디에이고에 남아 총독의 폭동 진압 작전을 돕고, 나머지 7명을 몬터레이 수비대로 데려가 샌프란시스코만 일대를 탐험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몬카다 총독은 “산디에이고 일대 원주민 폭동을 다스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폭동을 잘 진압해야만 알타 캘리포니아 일대 원주민 소요가 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몬카다 총독은 디 안자 사령관의 몬터레이와 샌프란시스코만 일대 정착촌 건설을 반대했다. 그는 일찍이 멕시코시티의 누에바 에스파냐(뉴 스페인) 총독에게 “디 안자의 이 같은 계획은 무모하다”고 별도로 반대 의사를 전달한 바 있다. 몬카다 총독은 또한 “누구도 자신의 허락 없이 현 위치를 변경할 수 없으며, 자신의 허락 없이 수비대나 선교원을 세울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선교원을 추가로 건립하고 요새를 새로 세우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주민을 완전히 제압하고, 또 병사들이 타고 달릴 말들이 건강하게 살찌고 튼튼해진 이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병사들은 불탄 수비대와 선교원을 보수했다. 불탄 지붕에 새로 갈대와 나뭇가지로 덮고, 주저앉은 울타리를 보수했다. 또다시 해변가에 고래가 떠밀려왔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폰트 신부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운신할 수 있었다. 그는 해변에 떠밀려왔다는 고래를 확인하려 6마일 거리의 해변을 찾았다. 그러나 떠밀려온 물체는 고래가 아닌, 3야드나 되는 거대한 물고기였다. 폰트 신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거대한 물고기의 살은 원주민들이 모두 베어가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먼 바다에는 물을 뿜는 고래들이 유유히 헤엄쳐 나가고 있었다.
1월 25일, 디 안자는 비밀리에 주모자 체포 작전에 나섰다. 지척을 구분할 수 없는 한밤중, 디 안자와 함께 산디에이고를 찾은 16명의 병사는 그리할바 상사의 지휘 아래 고양이처럼 조용히 수비대를 빠져나왔다. 주모자급 2명이 산루이스(San Luis) 원주민 부락에 은닉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원주민 사이에 정보가 누설될 우려가 있어 한밤중 비밀리에 작전에 나선 것이다. 그리할바 상사가 지휘하는 16명의 병사는 새벽녘 부락에 도착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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