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원 목사 알수록 재미있는 성경 나눔] 로마서 – 깊게 천천히 오래 보기 6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1:1)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만난 예수, 자신이 깨달은 복음,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그는 로마서에서 복음의 본질과 목적을 설명하고 크리스천의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다. 로마서는 이스라엘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로 소개한다. 그는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장황하게 떠벌리거나 설교 동영상에 관한 너튜브 조회수가 500만을 넘어 월수입이 얼마라는 등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과거 같았으면 “나, 이런 사람이야. 어디든지 내 이름만 대면 무사통과야!”하고 허풍을 떨었는지 모른다. 기독교 최고의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 장애자들을 위한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내가 얼마나 유명한 교수인지, 얼마나 많은 베스트 셀러를 출간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드는지 이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깜깜 무소식이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나 가족이야기 등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즐겁게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학력이나 경력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소책자를 출간했다.
그렇다! 우리는 거추장스러운 계급장이나 명찰 등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 구원의 목적은 죽어서 어디를 가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주의 일에 헌신하는 데 있다. 여기서 종은 자유가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노예라는 부정적인 의미 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속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껍데기를 벗어 버렸다. 더 이상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랑할 필요가 없었다. 아론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는 수많은 지지자들이 대선후보처럼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박수를 치며 그를 추종하자 인기에 영합하여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고 급기야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예수의 종은 오직 예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에게 속한 종과 보냄을 받은 사도로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바리새인은 분리된 사람이라는 의미이지만 그는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분리된 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단어로 착각해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를 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예슈아 하 마시아” 즉 ‘예수 메시아’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로 로마서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쁜 소식이고 근원지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기쁨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다르다. 그것은 잠시 왔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깊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듯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기쁨이다. 무더위에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타는 목마름이 내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했다. 오직 살아있는 생명의 물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다. 과연 우리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복음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면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원은 구하다(Save)는 동사에서 온 명사로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듯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고맙다는 말 대신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처럼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정상 부근을 표범의 시체가 말라붙어 있는 곳으로 묘사했다. 조용필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 지 묻지를 마라”고 노래했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오르려고 하는지, 그런 노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이다. 삶의 목표와 의미를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구원에도 목표와 의미가 있다.
정기원 목사 (602) 804-3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