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에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49년 노다지 소동 후 3만 5천여명으로 늘어
양식은 거의 바닥났다. 포톨라의 대원 몇 명이 사슴을 잡으러 해안가 자그마한 구릉인 쉬위니 리지(Sweeny Ridge)에 올랐다. 한 병사가 멀리 해안가로 눈을 돌리자 마침 희미한 안개 사이로 푸른 물이 출렁이는 거대한 만이 들어왔다. 병사들은 사슴 사냥도 포기한 채 포톨라 당시 알타 캘리포니아 지사를 겸한 포톨라 대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크레스피 신부는 그의 종군기에서 SF만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방대한 만은 넓고 훌륭한 항만에 알맞은 곳이라고 했다. 이 기록이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의 시초이다.
포톨라가 SF만을 발견하기 전인 1542년, 스페인의 포르투갈 태생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Juan Rodriguez Cabrillo: 1499?~1590, 1월 3일 캘리포니아 산미겔섬에서 부상 후 파상풍으로 사망)는 캘리포니아 연안 탐험과 전설의 북서항로를 찾아 뉴스페인을 출항했다. 그는 태평양을 따라 SF만 북쪽을 항해하고 산디에이고만에 정박하고 기록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짙은 안개와 거친 파도로 SF만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광대한 만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산타바바라, 채널제도, 몬트레이 등의 뱃길을 기록했다.
SF만 장기 체류자는 해적 드레이크
SF만 연안에서 정박하고 3개월여 체류한 유럽인은 영국이 비밀리에 공인한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 남미의 섬에서 이질로 사망)이다. 그는 스페인의 마젤란에 이어 1579년에서 1580년 2년 동안 두 번째로 세계를 일주했다. 그는 항해 중 1579년 폭풍으로 파손된 골든 하인드호를 수리하려 캘리포니아만 인근 해안 오늘의 드레이크만인 뉴 알비온(New Albion)에 3개월여 머물면서 파손된 선박을 수리했다. 드레이크와 해적인 선원들은 이곳 원주민 미워크 부족들과 친근하게 지냈다. 그는 해적으로 얻은 엄청난 금은보화를 싣고 영국에 도착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손수 드레이크가 도착하는 항구까지 나와 그의 귀국을 반겼다. 영국에서는 그를 ‘바다의 기사’로 부르고 스페인은 그를 ‘악마의 드레이크’라고 부른다. 드레이크는 장기간 샌프란시스코만 근해에서 체류한 유럽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유럽인의 SF만 근해를 오가는 뱃길이 늘어났다. 1595년 스페인 항해사 세바스티안 로드리게스 세르메오(Sebastian Rodriguez Cermeno: 1560~1602)는 스페인 마닐라 상선단의 선박을 지휘하여 오레곤 근방을 지났다. 마침 거친 폭풍우로 그가 몰던 선박은 크게 파손되어 침몰 직전이었다.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마젤란이 정박했던 마젤란만에 피신했다. 이곳에서 태풍을 피하던 세르메오는 태풍 속에서 귀한 화물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 선박은 불행하게도 침몰했다. 살아남은 선장 세르메오와 선원들은 원주민 미워크 부족의 도움으로 전 선원이 탈 수 있는 보트를 만들었다. 이들은 손수 마련한 보트를 타고 멕시코의 작은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설에는 세르메오 선장은 아시시의 샌프란시스코 성인에게 안전하게 해협을 지날 수 있도록 기도드렸다 하여 오늘의 지명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세바스티안 비즈카이노(Sebastian Vizcaino: 1548?~1627)는 산디에이고(San Diego), 산토마스(San Tomas), 트레스 레이스(Tres Reyes)의 3척의 선박을 지휘하여 캘리포니아 연안 해변의 항구와 해도를 찾아 탐험에 나섰다. 그는 특히 1602년 1월 2일 정박했던 만을 산디에이고만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승선했던 선박이 산디에이고호였다. 그때까지 비즈카이노는 카브리요가 1542년 이곳을 산미구엘만이라고 부른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는 산타바바라, 채널아일랜드 일대와 몬트레이 등의 지명을 남겼다. 그는 특히 몬트레이만의 지리적 요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해안가의 거대한 소나무 두 개가 있는 곳이 천혜의 요새라고 강조했다. 개스파 포톨라 탐험대는 비즈카이노가 강조한 몬트레이 해변의 장대한 소나무 두 개가 서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 SF만을 발견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해변의 해도와 많은 지명을 남겼다. 또한 그는 뉴 스페인의 대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도쿠가와 이에야스 대장군을 알현했다. 도쿠가와 대장군은 비즈카이노에게 금광을 개발하도록 섬을 대여했으나 금광 개발에는 실패했다.
‘약초의 땅’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개명
일찍부터 오흐로네 원주민들은 이주민들이 정착한 돌로레스 습지를 ‘좋은 약초의 땅’인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라고 불렀다. 그러나 1769년 광대한 SF만을 처음 발견한 개스파 포톨라 알타 캘리포니아 지사 겸 탐험대장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을 샌프란시스코만이라고 부르고 또 모든 문서에 기록했다. 특히 탐험대에 종군 사제로 동행한 후안 크레스피(Juan Crespi: 1721~1782) 신부는 1769년 11월 초 샌프란시스코만을 발견했으나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성인’ 축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하여 이곳을 SF만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다. 한편 탐험에 동행한 사제들 대부분이 프란시스코 교단 사제들이었다는 점도 이처럼 부르게 된 이유였다. 포톨라 대장도 ‘너른 만으로 흘러드는 강물을 샌프란시스코 강물’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원주민들은 ‘약초의 땅’이라고 불렀다. 1822년 멕시코 혁명으로 이 일대를 멕시코 혁명정부가 장악하면서 원주민은 물론 정착민들도 자연스레 ‘약초의 땅’으로 불렀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와 미국 정부는 텍사스 독립국가를 미국 정부가 병합하면서 양국 간에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전쟁에 패한 멕시코 정부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통해 1,825만 달러에 캘리포니아를 비롯하여 뉴멕시코, 컬럼비아, 아리조나, 네바다, 유타주 등 광대한 3백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을 미국에 넘겼다.
캘리포니아가 스페인에 이어 멕시코를 거쳐 미국의 영토가 되자 샌프란시스코 제23대 시장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조지아주 사반나 출신 사업가 워싱턴 A. 바트레트(Washington A. Bartlett)는 그간 약초의 땅으로 불리던 돌로레스 냇가의 습지대 일원을 샌프란시스코라고 개명했다.
수천 년 살아온 자신들의 생활 터전에 낯선 외지인이 몰려와 터를 잡아도 오흐로네 부족들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정착민들이 수비대나 선교원을 세울 때 임의로 노동력을 제공했다. 선교원 공사 때 하루 100여 명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마을끼리 협조하여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1780년 이후부터 약간의 마찰은 있었다. 이는 오흐로네 부족의 조직적인 저항이 아니라 개인 간에 정착민의 소나 말 같은 가축을 끌어가는 정도였다. 그만큼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쾌적한 기후처럼 오흐로네 부족의 심성도 고왔다.
(끝)

연재를 마치며
이상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가며
연재한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를 마칩니다.
장기간 귀중한 지면을 쾌히 제공한
제이 장 발행인에게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독자들의 성원에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이 70여 세에 시작한 연재가
이제는 팔십 중반을 넘어서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체력이 허락한다면 못다 한 이야기
‘대홍수가 세운 도시 챈들러’,
변호사들 농간으로 금광을 팔고도
‘비운에 자살을 택한 위켄버그’,
‘마지막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의
말년’과 원주민이 버린 사막의 땅에
‘불사조의 도시 피닉스’를 세우고도
역마차 강도 혐의자로 감방에서
죽어간 잭 스윌링(1830~1878) 등
다수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회가
되면 독자들과 함께 나눌까 합니다.
독자들에게 항상 행운과 건강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2026. 2.26 이범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