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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Nov
100년 전 이름없이 묻혔던 성전환자 묘비 세워 명예회복작성자: 아리조나타임즈 조회 수: 63
피닉스의 그린우드 메모리 장례 및 묘지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 묘지는 1906년에 오픈했다. 니콜라이 드 레일랜이 묻히던 그 해였다. 러시아 이민자였던 드 레일랜은 건강문제 때문에 피닉스에 왔지만 몇 달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지난 주 토요일 그에게 합당한 묘비가 주어질 때까지 이름없는 무덤이었다.
그의 단순한 묘비에는 그의 이름, 태어난 해 (1873)와 사망한 해 (1906), 그리고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당신을 다른 어떤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으로 남는 것은 가장 큰 성취이다"라는 인용구가 새겨졌다. 이 문구는 그에게 딱 맞는 것이었다.
드 레일랜은 1906년에 그의 담당의사와 함께 그가 2년간 앓고 있던 결핵을 수개월 간 사막 공기로 치료하기 위해 피닉스에 왔다. 그와 W.C. 로우 박사는 6 에브뉴와 워싱턴 스트릿에 위치한 유니언 호텔에 묵었다.
당시 33세의 잘생긴 청년 드 레일랜은 시카고에서 13년 간 러시아 영사의 개인비서로 일했었다. 시카고에 아내와 양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드 레일랜은 음주, 시가, 승마, 그리고 여자를 좋아했다. 그는 이혼 경력도 있었다.
피닉스에서 드 레일랜과 로우는 인근 술집과 식당에서 흥청망청 돈을 썼다. 그는 186 달러를 지불하고 개인 욕실을 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드 레일랜은 그의 아내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썼고 가족을 자랑스러워했었다.
의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드 레일랜의 상태는 악화됐다. 그는 자신이 사망한 후 반드시 아내가 자신의 몸을 닦아야 한다며 로우에게 아내를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드 레일랜이 1906년 12월 18일에 그의 객실에서 사망했을 때, 아내는 여전히 시카고에 있었다. 로우는 장의사에 몬과 드리스콜을 보내고 드 레일랜의 아내에게는 전보를 쳤다. 드리스콜이 다시 돌아와 드 레일랜의 몸에 방부처리를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발견을 했다.
드 레일랜은 원래 여성으로 태어났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 지역신문에서는 "평생을 남자로 살아 온 한 여성의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고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미스테리한 죽음으로 드러난 그에 못지 않은 미스테리."
성전환자들은 수백년 간 존재해왔고 그들을 묘사하는 현재와 같은 용어는 없었지만 그 당시에도 완전히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그 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도 이해되지도 않았으며 그들이 나설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성적 역할이 좁게 정의되던 시절이었다.
담당의사도 충격을 받았다. 그는 드 레일랜을 6개월 간 치료하며 그의 흉부를 검사했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자주 함께 이발소에 갔고 드 레일랜은 면도도 했었다.
드 레일랜의 당시 부인과 전 부인은 모두 그가 남자였음을 확신했다. 아들과 함께 피닉스를 찾은 미망인은 다시 한 번 그의 시신을 검사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13년 간을 모신 베런 본 슐리펜바흐 러시아 영사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시카고의 친구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행하고 같은 방에 숙박하고 심지어 함께 수영도 했지만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호기심으로 과열된 언론 보도는 드 레일랜의 유산을 놓고 법정다툼을 벌일 때까지 계속됐다. 법원에서는 드 레일랜의 결혼은 무효라며 현재 가치로 80만 달러 이상인 3124 달러를 당시 러시아에 있던 그의 어머니 세라피나 털레츠키가 받는 것으로 결정했다.
언론에서는 어떻게 드 레일랜이 10년 이상 그의 아내까지 속이며 남자 행세를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추측을 쏟아냈다.
그의 사망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한 법원 직원이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일기장을 발견하면서 그의 어린 시절 얘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후 드 레일랜의 스토리는 모두 잊혀졌지만 학술지나 LGBTQ 역사에 관한 서적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는 남자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묻힐 때는 그가 좋아하는 검은 짙은 색의 바지와 프록 코트 대신 흰 색의 긴 여성용 로브를 입혔다. 그의 사망신고서에도 그의 성별은 여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역사가이며 아리조나 LGBT+ 역사 프로젝트 (비영리단체 피닉스 프라이드와 아리조나주립대학 도서관과 협력)의 코디네이터인 마샬 쇼어는 드 레일랜이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쇼어는 약 1년 반 전에 드 레일랜에 대해 알게 됐다. Find a Grave라는 온라인 묘지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의 친구 도나 카를 통해 드 레일랜의 무덤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쇼어는 드 레일랜의 역사를 조사했고 그의 무덤이 의도적으로 무명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드 레일랜은 묘비를 세울 충분한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쇼어는 "묘비를 세우지 않은 것은 그의 스토리를 지우는 방법이었다"며 "나는 그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 그를 기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스토리가 가치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보통은 새로운 묘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친지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LGBTQ 커뮤니티와 지지자들로부터 묘비 비용 3000 달러가 모금됐다.
지난 주 토요일, 소규모의 참가자들이 드 레일랜의 이름이 적힌 임시 묘비를 세운 자리에 모였다. 실제 묘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토요일에는 임시로 적은 것을 이젤에 세워 놓았다.
대학생 연령의 아들이 성전환을 한 앨리슨 챈들러와 브래들리 부부도 이 날 참석해 오렌지 색과 노란 색의 데이지 꽃을 무덤의 꽃병에 꽂았다.
아리조나 TransAlliance을 공동으로 창단한 에리카 케플러가 온라인에서 에머슨의 문구를 찾았다. 케플러는 드 레일랜이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 문구 사용을 허락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드 레일랜의 스토리는 이제 아리조나 LGBTQ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