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도 어김없이 송년회 시즌이 왔습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을 얘기하고 나쁜 기억이 있으면 떨쳐버리려 각종 술 모임이 잦을 수 밖에 없는 때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술을 즐기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전날 폭음으로 Appointments를 연기하시는 환자분들을 뵈며 많은 한인분들이 송년회를 하시고 음주를 과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송년회를 가다 보면, 한 해의 다사다난(多事多難)은 숙취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어차피 가야 할 술자리와 들어야 할 술잔이 많은 게 한국 문화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술독’ 증상이 감춰진 질병의 신호일 수 있다는 점은 요긴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폭음 뒤의 설사 : 지방변
술 먹은 다음 날의 설사는 술과 함께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 지방변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알코올이 장의 연동운동을 증가시켜서 변이 묽어질 수도 있습니다. 단, 진행된 대장암이나 대장 결핵이 있으면 알코올이 파괴된 장 점막을 자극하여 설사를 악화시킵니다. 술을 쉬어도 설사가 지속된다면 이상(異常) 증상입니다.
폭음 뒤의 출혈 : 치질 or 대장암
폭탄주를 마신 다음 날 대변을 보다가 변기에 붉은 피가 흥건히 고였거나 항문을 닦은 휴지가 선홍색 피로 물들어 대장암인가 깜짝 놀라서 병원을 찾는 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치질에 따른 항문 출혈입니다. 장 속에서 일어난 출혈은 그렇게 빨갛지 않습니다. 장 출혈 피는 항문 밖으로 나오기 전에 장 속의 산소와 만나 까맣게 변한다. 오히려 대변 색깔이 이른바 짜장색이면 그게 대장암 징후일 가능성이 큽니다.
치질은 항문이나 항문 주위 혈관이 확장되어 이루어진 혈관 덩어리인데, 과도한 음주가 항문 혈관을 더욱 확장시켜 밖으로 도드라지게 합니다. ‘과음 후 화장실 출혈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입니다. 음주 후 이전에 없었던 항문 출혈이 생겼다면 숨어 있던 치질의 출몰이라고 보면 되고, 아니면 치질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폭음 뒤의 속쓰림 : 위궤양 or 만성위염
음주 후 속쓰림은 알코올 농도가 20%를 넘으면 위 점막에 세게 손상을 주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단되지 않은 위궤양이나 만성위염이 있으면 속쓰림이 증폭됩니다. 유난히 독한 속쓰림은 위장병 신호입니다. 알코올이 식도와 위장의 연결 부위 괄약근을 느슨하게 만드니, 과음 다음에 신물이 넘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까지 뻐근할 정도면 이미 역류성 식도염까지 올라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분에 넘치는 술을 마시다 보면 토할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이때 피가 나오면 위험한 상황입니다. 구토 과정에서 식도가 찢어지는 ‘말로리 와이즈 증후군’일 수 있으니 바로 응급실로 가야 합니다.
폭음 뒤의 빨라진 맥박 : 관상동맥경화 or 협심증
술을 마시면 맥박이 빨라져 심장이 바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심장 확장과 박동 간격이 짧아 한 번에 방출되는 피의 양이 줄어듭니다.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동맥경화로 좁아져 있으면 협심증이 촉발될 수 있습니다. 술에는 또한 중성 지방을 높이는 성분이 있습니다. 피를 끈적거리게 하여 협심증을 악화시킵니다. 과음 후 평소와 달리 가슴이 답답하고 뻐근하면 협심증 초기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신체 증상은 몸에 과부하가 걸릴 때 증폭되는데, 사람들은 흔히 그걸 과부하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다양한 증상의 숙취를 술 탓으로 돌린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잠재해 있던 질병이 음주 때문에 드러났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병원에서 하는 검사 중에 ‘스트레스 테스트’라는 게 있습니다. 신체에 질병 유발 요인을 가해서 평소에 발견되지 않던 숨어 있는 질병을 찾아내는 검사입니다. 송년 음주는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인 셈입니다. 하지만 테스트를 위해 일부러 폭음을 자주 하시는 것은 건강을 해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본 칼럼은 조선일보 김철중 기자의 글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