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사라진 낙타부대의 슬픈 사연 (3) 경매로 팔려나가는 낙타들

KAZT 어드민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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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가 미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그 충격은 엉뚱하게도 낙타들에게 몰아쳤다. 캠프 버어디에서 그런대로 지내던 낙타와 캘리포니아의 테혼 요새의 낙타는 남부와 북부간에 점차 전운이 감돌면서 이제는 내일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텍사스가 연방 탈퇴 쪽으로 급격히 기울자 텍사스 주둔 사령관 트위그 소장은 1860년 12월20일 워싱턴의 군 사령부에 편지를 보내 별 볼 일 없는 캠프 버어디의 낙타를 팔아버리자고 제의했다. 그는 낙타가 팔리지 않으면 아예 들판에 내다버려 매달 낙타에 들어가는 돈 560 달러를 절약하자고 했다. 그러나 워싱턴 당국의 지침이 내려오기도 전 1861년 1월28일 텍사스의 분리주의자들은 미 연방에서 탈퇴를 결의하고 텍사스 주둔군의 정부재산인 무기와 군수품 그리고 말과 노새까지 몰수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남부 조지아 출신의 트위그 소장은 전혀 저항을 하지않고 정부재산을 순순히 내주었다. 트위그 장군의 이같은 태도에 분개한 프로이드 장관은 트위그 소장을 즉시 해임했다. 

텍사스 민병대 낙타를 몰수하다 

캠프 버어디는 1861년 2월28일 텍사스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했다. 낙타 우리안에 있던 80여 마리의 낙타는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하면서 이들의 기구한 시련은 시작되었다. 텍사스 레인저인 민병대들은 연방군과 달리 낙타를 거칠게 다루었다.

낙타는 텍사스 레인저의 민병대에 의해 소금이 생산되는 브론스빌 마을에 끌려나왔다. 낙타들은 소금을 싣고 몇백마일 거리의 남부군에게 소금을 운반하기도 하고 몸의 균형을 잡기위해 양옆에 목화 뭉치를 달고 멕시코까지 운반하기도 했다. 또한 화물운송에 동원되지 않은 낙타는 재미로 동네 여인들이나 어린이를 태워주는 등 놀이감이 되었다.

텍사스 병사들은 낙타를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낙타를 몰던 어느 병사는 낙타 한 마리가 다른 낙타와 제대로 보조를 마추지 않는다고 매질을 했다. 낙타가 화를 내자 이 병사는 칼로 낙타의 목을 찔러 죽였다. 어느 병사는 낙타를 수십길 벼랑에서 밀어 죽였다. 이후 사람들은 낙타가 떨어진 자리를 “카멜스 리프”라고 불렀다. 어느 날 한 병사는 낙타 관리가 귀찮다고 3 마리를 들판에 내다버렸다. 놀랍게도 이 낙타들은 북군과 남군의 전쟁터를 가로질러 알칸사에 나타났다. 낙타 3 마리를 생포한 북군병사들은 이 낙타를 아이오와의 드 모인 강변 파덴 목장에 보냈다. 이후 3 마리 낙타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세인트 루이스에서 경매처분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어느 텍사스 레인저 출신 민병대원은 “낙타를 마치 막대기에 달린 옹이처럼 버리지도 못하고 귀찮아했다”고 회상했다. 

낙타를 심하게  구박하는 텍사스 민병대

남북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막바지에 이르자 북군은 1865년 12월19일 텍사스의 갈베스톤에서 텍사스 남부군의 전 재산을 몰수한다고 발표했다. 이제 캠프 버어디의 낙타우리에서 남군의 학대를 받던 66 마리의 낙타는 다시 북군의 품에 들어갔다. 1858년부터 낙타 우리의  감독관으로 근무한 램시는 이 소식을 듣고 북군의 텍사스 주둔 사령부에 “캠프 버어디에 있는 낙타 66 마리를 보호하고 있읍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의 편지는 지금까지 낙타를 관리하고 있으니 그간 미지급된 임금을 지급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낙타를 다루는 병사들이 남군에서 북군으로 바뀌었을 뿐 낙타들의 처지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그간 낙타를 아끼던 군 고위층은 이미 워싱턴 정가에서 사라졌고 대신 들어선 인사들도 한가하게 낙타의 앞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걸프지역 주둔군사령부의 병참장교  소우텔 (E. G.Sawtelle) 중령은 국방장관 스탠튼 (Edwin M.Stanton)에게 낙타에 대한 지침을 요청했다. 스탠튼 장관은 “낙타가 변방에 산재한 군의 요새간 군수품 운송에 요긴한 것을 알지만 당장 군 작전에 활용할 수 없으니 민간에게 매각하여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라”고 회신했다.

1866년 3월7일 66 마리의 낙타는 뉴우올리안즈로 끌려나와 경매장에 들어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응찰한 사람은 모두 3명. 산 안토니오 근방에 살면서 오가는 낙타를 자주 보고 낙타에 관심을 가졌던 베델 쿠프우드는 한 마리 당 31 달러, 그리고 조셉 할람은 10 달러, 호레이스 벨이라는 사나이는 4 마리에 25 달러, 그리고 마리 당 5 달러면 66 마리를 모두 사겠다고 했다. 오후 7시 40분 소우텔 중령은 스탠튼 장관에게 전보로 입찰 결과를 보고한후 장관의 지시에 따라 31 달러를 제시한 최고 응찰자 베델에게 낙타 66 마리를 모두 양도했다.

한마리에  31달러에  팔려나간 낙타

낙타 66 마리를 손에 넣은 베텔은 1827년 알칸사에서 태어나 1846년 텍사스로 흘러들어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1854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법률관계 일을 보고 다시 리오 그랜데 근방으로 돌아와 생활하다 남북전쟁시에는 남군의 기병대위로 복무했다.

모두 1699 달러로 낙타 66 마리의 주인이 된 베델은 얼마 후 낙타 5 마리를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 단에 3745 달러에 팔아 투자금보다 많은 2046 달러의 이익을 보았다. 베델은 다시 낙타와 함께 라리도라는 마을로 가서 텍사스와 멕시코간 화물운송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델의 화물운송업은 멕시코 산적과 백인 노상강도 등쌀로 얼마 후 접었다.

베델은 이후 몇 차례 멕시코 국경을 넘나들며 서커스단에  낙타를 팔기도 하고 흥미있어 하는 일반인에게 낙타를 팔아가며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베델이 낙타를 몰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 땅에 들어서자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이 낙타에 찍힌  낙인만 보고 정부 소유라고 모두 몰수해 버렸다. 이미 낙타라면 머리를 흔들던 베델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않고 병사들이 사실을 확인할 때만 기다렸다. 낙타를 다시 찾은 베델은 낙타를 몰고 서쪽으로 향하여 아리조나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별다른 회신을 받지못했다. 베델과 기구한 낙타에  대한 행적은 이후 확인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테혼 요새에 있는 낙타들의 처지도 텍사스의 낙타와 마찬가지였다. 이곳 낙타도 모두 경매로 팔려나가 서부 여러지방을 떠돌다 이후 주인없이 광야를 유령처럼 떠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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