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정기원 목사 알수록 재미있는 성경 나눔] 태산같은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 61

KAZT 어드민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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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올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의 친구이고 선지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될 것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약속을 주셨다. 그는 큰 나라의 시작이고 근원이며 세상의 상속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약속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의 주인공이었다. 그를 통해서 세상에 복과 저주가 임한다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와 상관이 있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역시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었을 때 그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문제인데 굳이 내가 알 필요가 있냐고 시큰둥하게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일처럼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반응을 할 것인가? 이 문제는 그가 세상을 대표하는 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시험대 역할을 했다.

정의에 관한 논쟁
아브라함은 “내가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하나님과 논쟁을 시작했다. 히브리어 “호알티(hoalti)”는 “야알(yaal)”에서 온 동사로 말하다는 뜻과 더불어 ‘기꺼이 말을 하다. 처음이 되다. 책임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말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가족과 친척을 버리고 소유하고 있던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소셜 연금도 포기한 채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끔찍한 명령에도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속을 끓였을 뿐 아무 토를 달지 않고 순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견을 피력하며 하나님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논쟁을 할 생각을 했을까? 그런 그의 대담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가 하나님과 벌인 논쟁은 아브라함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는 오랜 침묵을 깨고 “주께서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하려 하십니까?”하고 말문을 열었다.그는 심판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잘잘못을 가려 잘못한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정의는 보복과 응징이 따르는 심판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악인이 벌을 받는 것은 그렇다쳐도 만약 그것으로 인해 옆에 있던 의인이 피해를 보거나 억울한 희생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악인들만 가려내어 한 장소에 모아놓고 심판을 하면 모를까 불똥이 잘못튀어 무고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다면 그것이 과연 정의라는 이름아래 용납될 수 있는가? 그의 관심사는 정의와 심판이 아니라 사람의 소중한 생명에 있었다. “모든 생명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생겨나며, 오직 이런 관계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존한다”고 헤겔은 말했다. 한 생명의 희생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그런 가능성마저 용납하지 않는 아브라함은 살아있는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악인을 잡으려다 의인까지 잡는다면 집에 들어온 거미 한 마리를 잡으려고 화염방사기를 난사하여 집 전체를 태워버리는 꼴이 된다. 물론 죄에 대한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정의가 가진 심판과 사랑의 두 측면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하는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정의의 딜레마이다. 아브라함은 “
만약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이 살고 있다면 이 50명을 위해서라도 심판의 계획을 철회할 용의가 있습니까?”하고 의인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50명이라는 숫자의 무게에 중압감을 느껴 도저히 자신이 없었는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계속 숫자를 줄여가며 하나님과 끈질긴 협상을 시작했다. 
오래된 한국 영화 중 “애니멀 타운”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곳, 도덕과 윤리가 실종되고 동물적인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며 살아가는환락의 도시에서 과연 의인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최소한의 가능성에 매달렸다. 다가올 심판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착잡하고 안타까웠다.그는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10명이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물었다. 숫자를 줄여가다 왜 10명에서 멈췄을까? 50은 당시 작은 소도시의 절반에 해당하는 큰 수였고 10은 조직을 형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이면서 동시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가장 큰 수였다. 또 10은 완전 수이고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정기원 목사 (602) 804-3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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