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북미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탐욕자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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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땅’을 찾는 바이킹들
회색빛 하늘에는 온통 차가운 북극의 바람이 가득했다. 하늘이 열린 이래 살을 에는 듯한 북대서양 매운 추위로 얼어붙은 동토의 땅은 언제나 그렇듯이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차갑게 얼어있었다. 
동토의 땅 그린랜드에 외지인이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서기 11세기 초. 옛부터 전해지는 바이킹들의 땅 노르웨이 부족들의 전설에 의하면 노르웨이 탐험가 에릭 더 레드 (Erik the Red: *c 950- 1003)는 미지의 바다와 땅을 찾아 항해길에 나섰다. 그리고 차가운  북대서양 파도를 외면한 채 묵묵히 떠있는 그린랜드(Greenland) 섬에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이 섬의 이름을 그린랜드라고 불렀다. 그는 다시 탐욕스런 눈을 번뜩이며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 인근 해안을 탐험했다. 
유럽인으로 북대서양 연안 북미 대륙에 처음으로 족적을 남긴 인간은 그의 아들 레이프 에릭손(Leif Erikson). 서기 1001년 에릭 더 레드 아들 에릭손은 캐나다 북동쪽 해안을 탐험하고 오늘의 뉴펀드랜드 섬의 한편 빈랜드 (Vinland)에 족적을 남겼다. 옛부터 전해지는 노르웨이의 전설에 의하면 에릭손과 그의 대원들은 대서양 북쪽 연안을 따라 브라마스 (Bramas)까지 탐험하고 이곳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겨울을 났다는 유적 ‘L’Anse aux-Meadows’은 1963년 발견되어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노르웨이 전설은 사실임이 증명됐다. 이들은 옛날 빈랜드 (Vinland)라고 불리웠던 뉴펀드랜드에 상륙한 후 캐나다에서 겨울을 났다. 웬일인지 그들은 더 이상 정착촌을 이루지않고 떠나버렸다. 노르웨이 탐험가 부자간의 신대륙 탐험은 실제 크리스토퍼 컬럼부스보다 근 500여년 앞섰다.

‘향신료의 땅’ 아시아로 가는 뱃길을 찾아라
회색빛 하늘과 동토의 땅은 수세기동안 유럽인들에게는 잊혀진 땅이었다. 그러나 1492년 8월 크리스토퍼 컬럼부스가 향신료의 땅 아시아로 가는 길을 잘못들어 서인도 제도에 발을 디딘 이래 이에 자극을 받은 탐욕스런 유럽인들은 신대륙으로 가는 뱃길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영국의 헨리 7세(*1457.1.28-1509 4.21: 재위기간 1485.8.22-1509.4.21.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첫번째 잉글랜드 국왕)는 1497년 베네치안 항해사 존 캐봇 (John Cabot)을 고용한 후 후원하여 향신료의 땅 아시아로 가는 뱃길을 찾도록 했다. 캐봇은 서쪽으로 항해하는 도중 뉴펜드랜드에 기항했다. 캐봇의 이같은 뉴펀드랜드 기항은 이후 영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권리주장에 근거가 됐다. 그후 영국의 어부를 비롯하여 폴투기쉬 어부들이 철따라 뉴펀드랜드에서 정기적으로 고기잡이를 했다. 카리비안을 찾은 컬럼부스는 당시 북미대륙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제국은 카리비안 제국을 손에 넣은 것을 빌미로 북미대륙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고나섰다. 1513년 스페인의 디 레온 (*Juan de Leon: 스페인의 Santevas de Camos에서 태어나 1521년 7월 쿠바의 하바나에서 사망한 스페인의 탐험가겸 정복자. 그는 1513년 푸에르토리코와 플로리다를 탐험했다)은 1513년  오늘의  플로리다 반도 세인트 어거스틴에 상륙했다. 디 레온이 플로리다를 탐험하고 이어 1522년 멕시코를 정복하면서 스페인은 서반구에 확실히 위치를 확립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가 남미일대와 북미주 대륙을 아우르는 새로운 신세계 지도를 출간하면서 미주 대륙에 대한 유럽인의 지식이 높아졌다.

신세계에 탐욕의 발톱을 가는 유럽 열강들
1529년 캐나다의 라브라도 (Labrado)에서부터  티에라 델 프에고 (Tlerra del Fuego)까지 대서양 해안을 그린 믿을만한 지도가 발간되었다. 이 지도가 출간되면서 유럽 열강들이 그간 꿈꾸어왔던 북서쪽 바닷길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 바닷길을  더 이상 찾지않게되었다. 스페인 탐험가 프랜시스 피자로 (Francis Pizzaro)가 페루를 정복할 즈음 헤르난도 소토 (Hernando Soto)는 1539년 큐바의 하바나를 떠나 플로리다에 상륙했다. 그는 계속해서 노다지를 찾아 미대륙 남동쪽을 거쳐 미시시피 강 까지 이르렀다. 또다른 스페인 탐험가 프란시스코 코로나도 (Francisco Coronado)는 1540년 북미대륙에 전설로 떠도는 7개의 황금도시를 찾아 나섰다. 그는 황금도시 찾기에는 실패했으나 그의 탐험대원은 처음으로 그랜드 캐년에 발을 디뎟다. 코로나도는 오늘의 캔사스까지 발길을 넓혔다. 그러나 코로나도의 탐험대가 몰고갔던 양, 염소의 가축 중 일부는 현지에서 살아남아 원주민들과 함께 현지에 적응했다. 특히 대열을 이탈하고 들판으로  달아난 말을 길들인 원주민은 세월이 지나면서 능숙하게 말을 다룰 수 있었다. 이후 원주민들은 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활동 영역을 북미대륙에 무한대로 넓힐 수 있었다.
스페인에 이어 또 다른 탐욕스런 프랑스 인들도 탐험과 모험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신대륙의 3가지 진기한 물건인 금붙이와  젊어진다는 샘물을 찾아 동인도로 가는 바닷길 개척에 나섰다. 이들은 동인도 가는 뱃길이 대륙 어디쯤에 있고 얼마만큼 가면 발견할 수 있는지는 상관하지않았다. 그들은 또한 얼마나 깊은 만이나 강을 지나야하는 지도 몰랐다. 다만 그들은 강이나 만을 지나면 그들이 찾는 이상향의 신비스런 향신료의 땅 아시아 대륙을 만난다고 믿었다.
스페인 제국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도중 오늘의 미대륙 북쪽 지역은 지오바니 다 벨라자노 (Giovanni da Verrazano)같은 여행객에 의해 서서히 그 실체가 밝혀졌다. 프로렌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고용된 벨라자노는 1524년 북 캐롤라이나를 발견하고 대서양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여 오늘의 뉴욕항을 지났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프랑스 탐험가 쟈크 까르띠에 (Jacques Cartier)는 유럽 제국의 항해사들처럼 아시아로 가는 뱃길 개척에 나섰다. 그는 캐나다의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탐험하며 북상했다. 그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프랑스 식민지인 퀘벡 (Quebec)을 건설했다. 
프렌치 휴게노트 (French Huguenots)는 20년 후 플로리다 북쪽 해안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같은 프랑스의 정착촌은 1565년 스페인 측이 걸프 스트림을 따라 자신들의 무역항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무력으로 점령했다. 그리고 얼마 후 스페인의 페드로 메넴더즈 (Pedro Menemdez)는 점령한 프랑스 정착촌에서 얼마간 거리에 세인트 어거스틴이라는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것이 북미대륙에 건설한 최초의 유럽식 정착촌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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