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바다 안개너머 샌프란시스코 만이 보인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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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둔 십자가 밑에 부러진 화살
새로운 탐험대겸 요새를 신축할 74명의 대원은 1770년 4월 17일 산디에이고를 출발하여 제1차 탐험 때와 동일한 노선을 따라 몬트레이로 향했다. 이들은 출발 5주만인 5월 24일 별다른 사고없이 몬트레이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크레스피 신부와 페이지 중위가 눈의 염증으로 고생했다. 도착즉시 크레스피 신부와 포톨라 총독은 경호원 1명을 대동하고 지난해 12월 몬트레이에서 철수할 때 바다가 보이는 소나무 숲에 세워둔 십자가를 보러갔다. 다행히 십자가는 그대로 서있었다. 다만 십자가 기둥 주위에 새털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죽은 정어리 물고기, 부러진 화살이 눈에 띄였다. 원주민은 보이지 않았다. 연안 바닷가 바위에는 수달과 바다표범이 한가롭게 물속을 유영하고 일부 수달과 바다 표범은 바위에 올라 한가롭게 햇살을 즐기고 연안 바위를 때리는 파도만이 주위에 가득했다. 모든게 평화로웠다. 
포톨라 총독과 크레스피 신부 경호원 세사람은 다시 해변에 늘어선 바위를 따라 남쪽에 위치한 카멜 만으로 향했다. 마침 원주민들이 다가와 친선의 표시로 열매와 씨앗을 들고왔다. 포톨라 총독도 준비한 유리구슬 등을 선물했다. 측량기사 미구엘 코스탄소 (Miguel Costanso)는 요새가 들어설 부지를 확정하고 인근 지도와 요새를 설계했다. 대원을 몬트레이까지 인솔한 포톨라 총독은 업무협의차 선편으로 급히 멕시코로 출발했다.

몬트레이 만에 대포 11문을 둔 포대설치
포톨라 총독을 대신하여 페드로 페이지가 1770년 6월 3일 기공식을 갖고 앞장서 공사를 지휘했다. 페이지 중위는 상부에서 제시한 공사기일을 지키기위해 병사들의 군기를 엄하게 다스렸다. 요새 공사에 동원된 병사들이나 산안토니오 편으로 로레토 선교원 지역에서 몬트레이를 찾은 이주민은 임의로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담배를 말아피워도 엄한 벌을 받았다. 심지어 공사는 일요일에도 강행했다. 그러나 사제들의 격한 반발로 이후 일요일은 경건한 주님의 시간을 갖게되었다. 이러한 공사는 1770년에서 1771년 완공 때까지 계속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병사들은 질척이는 진흙탕 길을 걸어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들어가 해풍에 단단하게 강해진 나무를 날카로운 도끼를 휘둘러 베었다. 곧은 나무가 땅을 구르며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한동안 몬트레이 만을 울렸다. 노새는 딩구는 나무를 힘겹게 끌어내렸다. 공사에 동원된 병사들은 진흙으로 엉망이 된 비탈길을 뒤뚱대며 노새를 몰았다. 작업이 끝나도 이들에게는 몸을 씻거나 옷을 세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같은 강행군은 근 1년 반이나 계속되었다. 다행이 현장을 방문한 세라 신부의 설득으로 페이지 중위의 무자비한 공사 강행은 뜸해졌다.
일년 반의 공사 끝에 요새에는 요새의 사령관, 장교 또는 병사들이 거처할 정방형의 막사가 그해 12월말 완공되었다. 그리고 만을 둘러싼 연안에는 바다와 만의 입구를 향해 대포 11문을 설치한 포대가 들어섰다. 이 포대를 엘 까르티요 라고 불렀다.
후니페로 세라 신부는 머물던 산디에이고 요새를 떠나 페레즈 선장이 지휘하는 산안토니오 호를 타고 비즈카이노  신부와 함께 1770년 4월 17일 몬트레이로 향했다. 산디에이고에는 고메즈 신부와 페론신부가 몇몇 병사들과 함께 요새와 선교원의 잔무를 처리했다. 페레즈 신부가 지휘하는 산안토니오호는 그해  5월 31일 정착민들이 기다리는 몬트레이 만에 도착했다. 산디에이고에서 요새와 선교원 신축공사에 동원되었던 잔여 인력은 육상으로 몬트레이로 향했다. 1770년 6월 3일 요새와 선교원은 동시에 착공에 들어갔다. 신축될 선교원은 산 카를로스 볼로메오 (*San Carlos Borromeo: 1538,10.2-1584,11.3, 밀라노 대주교)라고 불렀다.

공사기일 단축에 휴식시간도 제한
요새 공사에 동원된 병사와 정착민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나무가지와 덤불로 별을 가렸다. 몬트레이 만에 처음 선교원을 세울 때 양식은 보급선에 의존하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주로 양식을 도움받아가면서 공사를 마무리했다. 선교원은 엘리야 (Elija) 선지자가 이교도 바알(Baal)과 아스타테(Astarte)를 무찔렀다는 카멜산에 들어섰다. 세라 신부는 선교원 주변 원주민 코스타노안 (Costanoan)과 에셀렌 (Esselen) 부족에게 양, 염소, 젖소 등 가축을 분양하고 또한 밀, 보리, 옥수수와 각종 채소를 소개했다. 세라 신부는 이 선교원을 본부삼아 캘리포니아 일대에 선교원을 점차 늘려나갔다. 이곳에 선교원이 들어서자 세라 신부는 1771년 8월 24일 페블비치 남쪽 방향에 있는 카멜 (Carmel)산 근처로 이전했다. 세라 신부는 카멜산 아래 선교원을 본부삼아 1771년 7월에는 산안토니아 파두아에 그리고 1771년 8월에는 LA근방에 산가브리엘 아루찬겔 선교원을, 그리고 1772년 9월에는 산루이스 오비스포에 선교원을 세웠다. 세라 신부의 야심찬 선교원 신설에 포톨라 대신 요새의 방어와 신축을 책임진 페이즈 중위는 100여명의 병력으로는 요새와 산재해 있는 여러 선교원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더 이상 선교원 신축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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