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아리조나’지명을 전 미국에 알린 ‘디 안자’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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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길목을 막았던 원주민과 거칠고 사나운 아파치들이 쳐놓은 거대한 빗장은 좀체 거두어지지 않았다.
1700년대 초 뗏목을 타고 콜로라도 강을 건너 퀘첸 부족의 땅인 유마 부족 마을에 도착한 예수회 소속 에우제비오 키노 신부가 캘리포니아는 섬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라고 발표했어도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육상의 길은 무한의 세월이 흘러도 좀체 열리지 않았다. 외부인들에게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않은 숨겨진 풀꽃같은 지상 최고의 낙원의 바하 캘리포니아는 1701년 에우제비오 키노 신부가 바하캘리포니아에서 사목하던 살바티에라 신부와 회동하고도 60여년의 구름같은 세월이 흐른 다음 굳게 닫혔던 빗장은 서서히 거두어졌다.
뉴스페인 제국의 최변방 소노라 이북지역은 빗장처럼 가로막은 사나운 아파치들의 준동으로 정착민은 좀체 더 나아가지못했다. 그러는동안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한 대영제국은 서서히 알타캘리포니아를 노렸다. 또한 러시아 제국도 소노마 일대의 서부 해안에 비버모피 사냥터를 마련하려 캘리포니아를 탐했다. 스페인의 후앙 로드리게즈 까브리요 이후 알타캘리포니아를 스페인 황제의 영토라고 선포한 스페인 황실은 서둘러 무주공산이 된 알타캘리포니아의 서부해안에 요새와 선교원을 세우고 정착촌 마련에 부심했다.

1600년대부터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을 얻어
뉴스페인 제국의 이북지역이 아메리카라고 처음 불리운 것은 1562년 스페인의 지도제작자 디에고 구티레즈 (Diego Gutierrez)가 제작한 지도에 ‘아메리카’라는 지명을 표기하고부터이다. 구티레즈는 1510년 스페인 소설가 가르시 고드레게즈 몬타보 (Garci Rodriguez Montavo)가 출간한 소설 ‘에스플란디안의 모험(The Exploit of Esplandian )’에 등장하는 칼라피아 (Calafia) 여왕이 다스리는 여자전사들의 섬 캘리포니아에서 인용했다. 아마존에 존재한다는 이 섬은 금을 비롯한 귀한 보물이 많다는 환상속의 지상낙원. 여왕과 여자 전사들은 이 섬에 사는 사나운 괴물과 싸우고 결국 여왕은 이 섬을 지키기위해 기독교인이 된 후 에스플란디안의 사촌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아즈텍 제국의 정복자 헤르난 코르테스가 처음 캘리포니아라는 지명을 사용했다하나 공인된 정설은 아니다.
키노 신부가 소노라와 피멜리아 알타에서 선교에 전념하는 동안 예수회의 후앙 마리아 디  살바티에라 (Juan Maria de Salvatierra, 1648.11.15-1717.7.17 과달라하라에서 사망) 신부는 1697년 10월 19일 캘리포니아 만 연안 라 파즈에서 223마일 거리의 콘초(Concho) 모퀴윈 부락의 로레토 (Loreto)에 선교원 누에스타 세뇨르 디 로레토 콘초 (Nuesta Senora de Loreto Concho)를 세웠다. 이후 1697년까지 바하 일대에는 무려 17개의 선교원과 많은 공소를 세워 원주민들을 하느님 품에 안내했다. 그는 또한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곡물과 야채, 과일, 가축은 물론 유럽의 생활방식을 소개했다. 선교원을 통해 유럽의 문화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원주민들은 이후 바하와 캘리포니아 총독이 된 개스파 포톨라의 산디에이고 와 몬트레이 탐험대의 길안내와 통역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독교인이 된 원주민, 탐험대의 길 안내
한편 키노 신부는 바하에서 선교하는 살바티에라 신부에게 많은 가축과 곡물을 구에이마스 (Guaymas)항구를 통해 전달하여 선교활동을 도왔다. 바하캘리포니아의 예수회 선교원은 1768년 2월3일 스페인 황제 촬스 3세의 추방령이 있기까지 무려 59명의 사제들이 전교에 전념했다. 이곳에는 19명의 사제들이 상주하며 전교했다. 또한 2명의 사제는 현지에서 순교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추방된 예수회를 대신해 프란시스코 교단의 사제들이 추방된 예수회 사제를 대신했다. 바하캘리포니아의 교구장으로 푸니페로 세라 신부가 부임했다. 바하캘리포니아의 총독에는 예수회 사제 추방과 프란시스코 교단 사제 부임에 공이 많은 개스퍼 포톨라가 임명되었다. 또한 포톨라 총독과 세라 신부는 산디에이고 와 몬트레이 만에 요새와 선교원을 세우고 스페인 주민 중심으로 정착촌을 세웠다. 이때 예수회가 세운 선교원을 통해 하느님을 받아들인 원주민들이 이후 탐험대의 수비대와 정착촌, 선교원 건설에 통역과 길 안내를 자청하여 스페인 측은 성공리에 탐험과 정착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살바티에라 신부가 선교원을 세울  때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에는 원주민 쿠메이에(Kumeyaay)부족, 코코파 (Cocopah)부족, 파이 파이 (Pai Pai) 부족, 키리와 (Kiliwa)부족, 코코치미(Cocochimi )부족, 몬큐이 (Moqui) 부족, 구에이쿠라 (Guaycura )부족, 페리쿠 (Pericu)부족들이 장장 760마일에 이르는 바하캘리포니아 반도의 동쪽으로는 캘리포니아 만과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끼고 근 6만여 명의 원주민들이 배를 고파하며 근근히 목숨을 유지했다. 이중 쿠메이에 부족과 코코파 부족들은 제한된 농경지에서 근근히 영농으로 생활했으나 대부분 부족들은 들과 황무지를 떠돌며 사냥으로 근근히 연명했다. 그리고 식수를 구하기위해 황무지를 어렵게 떠돌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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