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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Jan
<특별기고문> 재미한인교회, 21세기메시아닉제사장이되라(2)작성자: 아리조나타임즈 조회 수: 111
-재미 한인 이민 118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재미 한인의 본격적인 디아스포라 (해외 이주)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최절정기이며 구한말 심각한 정치 경제적 위기 상황가운데서 진행되었다. 여기서 1903년 1월 한국인들의 미국이민을 시발로 이제 재미 한인 이민의 역사는 곧 120년(2023년)을 맞이한다. 재미 한인 이민 120년의 중요한 이정표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재미 한인 특히 한인 교회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
재미 한인 이민의 제1기(1903-1945)
재미 한인 이민의 역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1903-1945)는 주로 하와이 농장 이민으로서 이 시기 한인들은 미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할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웨인 패터슨. 하와이 가는 길, 2002). 미국에서 돈을 벌어 귀향하는 것이 꿈이었고 그래서 더러 되돌아가긴 했지만, 아쉽게도 대다수는 일본의 한국 병탄사건(1910년)으로 불가피하게 미국내에 장기체류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한인 사회의 중심은 동포들이 세운 교회였고 교회는 그 본래적 종교적 기능만이 아니라 종교외적 기능들 즉 동포를 위한 사회적, 교육적 및 정신적 봉사의 기능까지 수행했다. 더구나 이 기간 하와이 및 미국 본토에 거주한 한인들의 최우선적이며 절체절명의 시대정신은 고국의 독립이었다. 그래서 이 당대 교회는 재미 한인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으며 독립운동 자금 출연의 원천이었다 (김형찬. The Korean Diaspora, 1977). 이 시대 걸출한 한인 동포 지도자로는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이승만 등을 거명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재미 한인 이민 역사의 제2기(1945-현재)
재미 한인 이민 역사의 2기는 1945년 이후 현재 까지의 기간으로서 이 시기에 온 한인 이민자들은, 먼저 온 사람들이 본국에서 주로 하류층 노동자들 중심이며 본국귀향을 염두에 둔 것과 달리, 주로 가족단위 이민자들(특히 1968년이후)로서 새로운 땅에서의 더나은 삶 즉 ‘어메리칸 드림’을 안고 온 사람들이다.
이 기간중 1940-50년대 이주자들은 주로 미군 군속, 입양고아, 그리고 유학생들이었다면 (이민역사의 막간시기)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몰려오는 이민자들은 가족단위의 이민 그리고 기존 한국사회에서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학력 등에서 중상류층을 형성하다가 온 부류라고 할 것이다.
1992년 4.29 폭동(the ‘Saigu Revolt’)의 충격적 사건
1960-1980년대에 미국에 와서 정착한 재미 한인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속에 있는 한국사람들’ (Koreans in America)로 불릴 것이다 (윤인진. 코리안 디아스포라, 2004). 즉 몸은 타국 미국에 와 있으나 마음은 다분히 본국 지향적인 정신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재미 한인의 이민생활의 방향성과 자기 정체성에 결정적인 전환계기를 가져온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1992년 4월 29일부터 3일간 전개된 로스 앤젤레스 폭동이다. 이 사건은 로드니 킹 재판의 결과가 도화선 구실을 했지만 심층 원인들은 그 당시 로스앤젤레스 시장과 경찰국장 사이의 골깊은 인종갈등으로 야기된 공권력의 외면, 무자비한 일방적 주류 언론의 편파 왜곡적 보도, 그리고 내재적으로 한인 자신들의 무기력과 무능과 연약 그리고 내부적 분열이 총체적으로 엮여서 한인들이 처절하게 유린 당한 충격적 사건으로서 일종의 미국의 모순된 체제갈등의 속죄양으로 희생당한 사건으로 볼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한인사회와 폭동사건을 심층 분석한 낸시 아벨만과 존 리(Nancy Abelmann and John Lie)는 그들의 공저에서 4.29 폭동으로 희생당한 재미 한인들을 ‘블루드림즈’(Blue Dreams) 즉 슬픈 어메리칸 드림으로 묘사했다.
4.29 폭동 사건의 대반전
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 폭동이후 이제 재미 한인 이민역사는 거의 30년(2022)을 경과한다. 그 사이 재미한인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주류 언론에 의하여, 돈만 알고 자기만 챙기며, 자기 유익을 방어하기 위해 건물 옥상에서 총을 들었던 자기방어를 불법폭도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했던 소수인종, 그리고 그런 주류사회로 부터 유린당했던 냉정한 현실을 비관하고 결국 자멸할 수도 있는 소수인종으로 전락했을까? 아니다. 그 이후 재미 한인사회는 비로소 눈을 떴다. 혼자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나만 잘 살면되는 것이 아님을. 그래서 그 폭동이 준 귀한 교훈은 이때로부터 재미한인들은 ‘미국내 한인들’에서 ‘미국내 코리언 어메리칸’ (Korean-Americans in America)으로서의 새로운 자기 정체성(self-definition)을 갖기 시작한다 (장태한. 신동아, 2012). 그 이야기는 기존의 본국 지향성을 탈피하고 내가 현재 발을 디디고 사는 미국 땅에 대한 새로운 주인의식과 주류사회에 대한 개입과 동참의 방향성을 제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폭동 당시 주류언론에 의하여 한인사회가 일방적으로 매도당할 때 한인사회의 입장과 의견을 효과적으로 대변할 수 없었던 과오를 반성하고 한인사회의 일치된 목소리를 전달할 유능한 대변자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또한 다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에서는 자기 주변의 다른 인종들과의 공존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흑인과 라티노 공동체와의 대화와 상호협력의 채널들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 때 한인 공동체가 주최한 평화와 화합을 위한 도보 행진 행사때 대형 태극기를 든 기수로서 봉사한 적도 있다.
그리고 가장 값진 교훈은 주류 정치체제를 상대로 재미 한인의 정치 경제적 및 법적 유익을 제대로 대변하고 방어할 유능한 정치인들의 배양을 절감하고 다양한 정치참여단체와 인재양성 기관들을 세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이상들의 실천중의 하나가 바로 ‘한미 연합회’ (Korean American Coalition)이며 이 단체의 주동자들이었던 영 김과 미셸 박 스틸은 이번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모두 공화당 의원들로 당선되고 미국 연방 의회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재미 한인 이민 역사는 자기 정체성 인식의 관점에서 1992년을 기점으로 이전의 ‘체류자 정신성’(1903-1992)에서 ‘정착과 개입의 정신성’(1992-현재)의 시대로 대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