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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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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샌프란시스코 언덕에 황제의 기를 꽂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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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디에이고 토착민 화살로 공격
수염투성이 외지인 까브리요 일행을  만난 토착민들은 놀랐다. 외지인들이 셔츠나 장신구를 주어도 이들은 무작정 달아났다. 쿠메이에이 부족들은 처음 까브리요 일행을 보고 수염투성이 얼굴을 한 외지인이 사람인지 아니면 짐승이나 악마가 아닌지 혼동스러워했다.(* 이후 쿠메이에이인들은 스페인 침입자들이 잔학하게 다루자 이들은 분명 악마라고 믿었다.) 얼마후 이들은 활로 공격해왔다. 이들의 공격으로 3명의 선원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모습을 드러낸 토착민들은 까브리요의 선원들처럼 수염투성이 얼굴에 옷을 걸치고 큰 개에 올라 탄 일행을 5일 정도 걸리는 곳에서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석궁과 칼을 들고 또한 오른 손으로 창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큰 개를  탄 외지인은 석궁과 창이나 칼로 많은 동족을 살해했다고 몸짓으로 말했다. 이때문에 까브리요 일행을 두려워한다고했다. 까브리요는 또다시 이들에게 손수 쓴 편지를 주고 다시 만나면 전해달라고 했다.
일행은 10월 3일까지 산미구엘 만에 머물면서 때마침 몰아닥친 심한 폭풍을 무사히 피했다. 그리고 연안을 따라 산타 카타리나와 산 클레멘트를 지나 산 페드로에 들어섰다. 이곳에도 들을 불태우는 연기가 자욱했다. 까브리요는 이곳을 “연기의 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0일 화요일 일행은 뉴스페인에서 본 것처럼 외양이 비슷한 집이 늘어선 항구에 도착했다. 바닷가에는 잘 만든 보우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보우트 안에는 노잡이 몇명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수천년 살아온 추마스 (Chumas)부족이었다. 이들은 말리부 연안에서 산루이스 오비스포에 걸쳐살았다. 그리고 인근 섬도 몇개 점령하고 있었다. 차무스 토착민들은 까브리요 일행을 가엽게 보고 친절하게 음식도 내주며 환영했다. 까브리요는 오늘의 무구 라군(Mugu Lagoon) 일대를  ‘까노아스 부락( Pueblo de las Canoas)’ 즉 ‘카누의 마을’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산타 바아바라 연안을 끼고 북상하면서 인근 섬사이를 살폈다. 근처에는 산타 로사, 산타 크루즈, 산 미구엘과 아나카파 같은 섬들이 흩어져 있었다. 섬사이 해협을 따라 까브리요의 3척의 함선은 산 크레멘트, 산타 카타리나, 산 니콜라스 와 산타 바아바라섬을 지났다. 이러한 섬들에게 각각 이름을 지어주며 해도에 그려넣었다.

추마스 인디안 가엽다고 음식을 제공
섬들을 살피며 인근 해협을 탐사하던 까브리요는 추마스 북쪽에서 흘러온   큰 강이 바다로 흘러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까브리요는 혹시나 이 강이 향료의 땅과 연결된다는 ‘아니안 해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의 꿈이었다.
11월 6일 월요일 까브리요는 해협을 가로질러 북으로 향했다. 11월 11일 토요일 까브리요의 3척의 함선은 산 시에몬 근방 연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한 밤중 바다가 거칠어지면서 심한 폭풍우에 바다는 출렁이기 시작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장대같은 빗줄기는 바람을 타고 사정없이 빈 돛대와 갑판을  내리쳤다. 심한 바람에 돛은 찢기었다. 손바닥만큼 작은 돛조각이 비바람에 흔들렸다. 선원들은 폭풍우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까브리요의 고함소리를 귓곁으로 들으며 갑판위를 이리저리 뛰었다.
마귀의 신음소리같은 폭풍우는 11일을 지나 12일, 그리고 13일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폭풍우는 간간이 며칠 더 계속되었다. 18일 다시 시작된 비바람에 3척의 함선은 제각기 밀려오는 파도에 떠내려갔다. 서로 의지한 채 파도를 떠돌던 함선이 흩어지자 선원들은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선원들은 옛날 컬럼버스가 폭풍우 속을 항해하면서 침착하게 성경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각자 자신이 의지하는 성인을 향해 보호해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했다. 까브리요도 자신의 성인에게 ‘만약 목숨을 구해주면 산살바도르 외지에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호소했다. 까브리요가 지휘하는 산살바도르 호는 엄청난 폭풍에 해안가로 밀려났다.

S.F 만을 지나 러시안 리버에서 돌아가기로 결심
다행히 좌초를 면한 산살바도르 호는 홀로 사철 푸른 들판이 보이는 까보 디 파인을 지났다. 아마도 오늘의 샌프란시스코 근방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폭풍우에 혼이 난 까브리요는 짙은 안개에 가려진 샌프란시스코 만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러시안 리버에 이르렀다. 이때 까브리요는 아니안 해협을 찾는데 실패했음을 자인했다. 바다는 점점 추워왔다. 폭풍우에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양식도 바닥났다. 까브리요는 이쯤에서 헤어진 함선을 찾아 떠났던 나비다드로 돌아가는 것만이 그나마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후 까브리요는 너른 바다위에 가랑잎처럼 떠도는 빅토리아 호를 발견했다. 이들은 서로 살아있음을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며 반겼다. 이어 까브리요는 산타 쿠르즈 항에 정박한 채  얼어죽기 직전의 산미구엘호 선원들을 만났다.
빅토리아 호 선원들은 몬트레이 해변에서 배에 바닷물이 스며드는 것을 손보았다. 그들이 함선을 손보는 동안 까브리요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대원 몇명을 이끌고 아니안 해협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가 찾는 해협은 어디에도 없었다.
빅토리아 호 수리를 끝낸 3척의 함선은 다시 남으로 향했다. 거칠고 날카로운 암벽이 늘어선 빅 서 (Big Sur)를 지났다. 일행은 11월 23일 목요일 남으로 항해하면서 섬들이 어지럽게 늘어선 섬들의 해협<Channel Islands>로 향했다. 그리고 바닷물이 스며드는 산 미구엘 호를 손보기 위해 연안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늘어선 섬을 찾아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인근 토착민들의 도움으로 추위를 피하고 연명했다. 그러나 처음 호의를 보이던 산 미구엘이나 산타 로사, 그리고 산타 카타리나의 토착민들도 이들을 거두는데 지쳤다.
점차 까브리요를 비롯한 3척의 선원은 자신들도 살기 힘든 토착민들의 불청객으로 전락했다.

불청객 선원들 구하다 까브리요 부상으로 사망
드디어 추마스 토착민들은 활과 화살로 무장한 채 불쌍한 외지인을 쫓아내기위해 공격했다. 토착민과의 교전으로 까브리요는 부상을 입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바닷가 겨울은 빨리 다가왔다.
크리스마스 즈음 어느 날, 몇명의 선원들이 해변가 샘에서 마실 물을 긷고 있었다. 이를 본 무장한 통바 (Tongva) 전사들이 몰려왔다. 전사들은 물을 긷는 선원들을 공격했다. 멀리서 이를 목격한 까브리요는 동료들과 함께 보우트를 저어 싸움이 한창인 해변으로 다가갔다. 해변에 이른 까브리요는 급한 마음에 배가 완전히 해변에 이르기 전 바다물에 뛰들었다. 그러나 그 충격으로 까브리요는 물에 잠긴 바위에 어깨와 팔, 그리고 정갱이를 다쳤다.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동료선원 베르가스(Francisco de Vergas)는 암반에 부딛쳐 정갱이 뼈를 다쳤다고 했다.) 그러나 까브리요는 교전중인 동료를 전원 구출할 때까지 돌아가 치료받기를 거부했다.
이후 염증은 전신으로 퍼졌다. 드디어 병세가 악화되자 까브리요는  탐험대의 지휘권을 수석 항해사 페레르에게 넘겼다. 그리고 운명할 때까지 항해일지에 그날그날의 일정을 세세히 기록했다.
1543년 1월3일 까브리요는 산 미구엘에서 영면했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산 미구엘 섬의 해변에서 그리운 가족을 그리며 영원히 잠들었다.
스페인 시장바닥을 떠돌던 포루투칼에서 태어나 스페인 시장터를 맴돌던 천애의 고아 까브리요는 지금도 어느 낯선 바다와 땅을 떠도는 꿈을 꾸며 잠자고 있을까. 그의 묘소 앞에 세워두었던 묘지석은 이후 산 미구엘 섬에서 발견되어 산 디에이고 해양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까브리요 대신 산 살바도르 함을 지휘한 페레르는 빅토리아 호와 산 미구엘호를 이끌고 1543년 4월 14일 떠났던 나비다드 항구에 지치고 각기병으로 초췌해진 선원을 이끌고 돌아왔다.

60년후 산 미구엘이 산 디에이고로 바뀌다
그리고 다시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태평양 일대를 항해하던 비즈카이노 (Sebastian Vizcaino: 1548 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 태생-1624사망)는 1602년 11월 10일 산 디에이고 호와 산토 토마스 그리고 트레스 레이스 호와 함께 태평양연안을 지났다. 마침 저녘무렵, 비즈카이노는 손가락처럼 대륙에 매달린 포인트 로마를 발견했다. 3척의 함선은 포인트 로마가 끼고있는 너른 만 안에 정박했다. 그리고 마침 불어닥친 폭풍을 무사히 피했다. 비즈카이노는 60년전 까브리요가 산 미구엘이라고 부른 천혜의 만을 타고 온 산 디에이고 호를 기려 산 디에이고 (San Diego de Alcala)라는 이름을 주었다. 비즈카이노는 이후 태평양 연안을 따라 필립핀을 찾았다. 그리고 1611년에는 뉴스페인을 찾은 일본 타나까 소슈케가 이끄는 특사일행을 무사히 일본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같은 배려로  당시 일본 최고실력자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그의 배려로 일본 열도의 작은 섬에서 금광을 개발했으나 실패했다. 2년후 1613년 비즈카이노는 귀국하면서 부임하는 뉴스페인 주재 초대 일본 대사 하세쿠라 추네나가 일행과 동승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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