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샌프란시스코 언덕에 황제의 기를 꽂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KAZT 어드민

newbeom.JPG

시나로아 수비대 창설후 태평양 연안 개발 시작
1626년에는 누에보 레온지방의 세라보에 산 그레고리오 수비대를 세웠다. 연이어 최북단 소노라의 야노스 지방에는 1685년 산티아고의 산 펠립프 수비대가 세워졌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듀랑고 지역에 모두 5개, 그리고 소노라 지역에 4개, 치와아 지역에 6개, 코아후이아 지역에 3개를 비롯 뉴 스페인의 리오 그란디 근방 엘파소 등에도 많은 수비대를 세우면서 토착민들의 소요를 억제하고 정착지를 확대하며 정착민을 보호했다.
이처럼 세워진 수비대는 독특한 방법으로 운영되었다. 아직 정복되지 않은 토착민과 맞대고 지내야하는 수비대의 대장은 경험이 많고 노련한 중견 장교가 임명되었다. 식민지 당국과 멀리 떨어진 최변방에 위치한 수비대의 대장은 사법과 행정, 수비를 겸한 시장 즉 알칼디 (Alcalde)라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시장이라는 직책을 가졌다.
기회의 땅 신세계 뉴스페인으로 탐욕의 사나이들이 달려왔을 때 기름지고 너른 계곡은 벌써 재빠른 사나이들의 차지였다. 노다지가 널려있다는 광산도 광부들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망한 사나이들은 기회를 찾아 아직 토착민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미정복지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뉴스페인 수도 치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멕시코 만 주변과 태평양 연안 후아후쿠 < Oaxaca>를 경계한 듀랑고 이북 누에바 갈리시아 주변에는 많은 스페인인과 유럽인의 정착촌이 있었다. 그러나 최변방 도시 쿠리아칸(Culiacan)을 지나 흘러들어온 탐욕의 사나이들은 화승총과 칼같은 무기로 토착민의 생활터전을 잠식했다. 어느새 시나리오 강 근방에는 산 펠립프 의 산티아고(San Felipe y Santiago)라고 부르는 정착촌이 생겼다.
정착촌이 생기자 토착민과 정착민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선교원이 들어섰다.
1591년 예수회 교단의 타피아 (Gonzales de Tapia) 사제와 페레즈 (Martin de Perez) 신부가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말을 타고 산티아고 정착촌을 찾았다. 외딴 변방 정착촌을 찾은 두 사제는 척박한 변방에서 정착민과 어울려 헌신적으로 외롭고 고달픈 정착민을 돌보았다. 그리고 기름진 생활터전을 잃고 떠도는 토착민들에게 다가가 함께 슬픔을 달래며 하느님 품으로 이들을 인도했다. 그러나 일단의 토착민 젊은이들은 외지에서 몰려온 정착민을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벌써 두 사제가 마을에 들어선 지 3년여가 흘렀다. 1594년 산디에고 마을 건너 토착민 마을을 찾았던 타피아 신부는 정착촌으로 돌아오던 중 일단의 불만에 찬 젊은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리고 범인들은 근처 주아퀴 (Zuaque) 강을 따라 북쪽으로 달아났다. 살인 사건을 계기로 정착민에 대한 토착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인근 부족에게 퍼졌다. 조용하던 시나로아 일대는 정착촌을 공격하는 토착민 폭도들때문에 정착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같은 사건은 이보다 근 30년전인 1564년 시나로아의 산 쥬앙 보티스타 디 카라포아 정착촌에, 그리고 1583년에는 산티아고 디 카라포아 정착촌이 토착민 공격으로 정착민이 전멸되고 정착촌은 페허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마다 정착민들은 수비대를 세워줄 것을 총독에게 청원했지만 병력부족등의 이유로 실현되지 않았다.

타피아 신부 살해후 정착촌에 수비대 설치
타피아 신부가 살해되고 또다시 토착민의 폭동이 일어나자 정착민들은 총독 벨라스코 (Luis de Velasco)에게 시나로아의 산티아고  정착촌에 수비대를 세워달라고 강력하게 탄원했다. 1595년 총독은 루이스 디 벨라스코에게 신설될 수비대의 병력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총독의 명령을 받은 디에고 페르난데즈 지사의 지원으로 알론소 디아즈 (Alonso Diaz) 대위와 24명의 병사는 듀랑고를 출발하여 시에라 마드레 옥시덴탈을 지나 시나로아의 산 펠립스 (San Felips) 강 근처에 도착했다. 그리고 강 주변에 산 펠립스 수비대를 건설했다.
정착촌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토착민의 저항도 점차 강해졌다. 이에 맞서 수비대의 병력도 증가하여 32명, 다시 43명이 상주했다. 이렇게 뉴스페인 최북단 시나로아에는 수비대가 신설되어 캘리포니아 북서쪽과 피멜리아 알타를 지키는 최변방 수비대가 되었다.
산 펠립스 수비대는 이후 시나로아 지역과 오늘의 아리조나 남쪽 지역과 소노라의 북서쪽을 지키는 뉴스페인 제국의 최북단 수비대가 되었다.
1626년경 수비대장을 역임한  퍼다이데 (Diego Martinez de Hurdaide)는 1600년경 까히타 언어를 상용하는 주아퀴, 마요 부족과 야퀴 강 계곡에 사는 토착민을 완전 평정하여 피멜리아 알타 (Pimeria Alta)지역에는 정착민의 농장과 광산이 들어섰다. 그리고 선교원의 사제들은 토착민을 상대로 활발하게 전교했다. 이로인해 그간 방치되었던 인근 캘리포니아 연안까지 정착촌이 들어섰다. 이처럼 정착지가 늘어나면서 수비대의 병력은 여러지역으로 분산되었다.
1671년 어느날 시나로아의 수비대장 부엘나 (Andreas de Buelna)는 15명의 병사와 함께 해안가에서 사냥중인 세리(Seri) 부족을 지켜보았다.

정착촌 확장따라 수비대  외딴 지역에 분산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토착민 대상으로 작전했다. 또 일부 병사는 후방의 토착민들을 감시했다. 이처럼 정착지가 분산되고 늘어나면서 수비대는 더 넓은 방어지역을 갖게되었고 자연 수비대는 변방 외딴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외진 곳에 자리한 수비대의 대장은 총독의 행정권이 미치지않는 정착촌의 방어업무 이외에 민원업무도 처리했다. 이처럼 사법과 행정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시장 직을 스페인에서는 알칼디 (Alcalde)라고 했다.
변방의 수비대장은 군사 업무까지도 갖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졌다. 수비대장 중에는 퍼다이데나 페드로 디 페레아 (1626-1630년 재임) 수비대장처럼 선교원의 사제들과 서로 협조하며 정착민과 토착민을 성심껏 돌본 수비대장이 있는가 하면 토착민으로부터 옥수수를 약탈한 후 광산에 되팔고 또 곡물의 유통을 독점하여 정착민과 토착민의 분노를 산 카스트로 (Ramirez de Castro) 같은 수비대장도 있었다. 또 어느 악랄한 수비대장은 광산과 농장에 엔코미엔다라는 구실로 토착민의 노임을 지불하지 않아 토착민 폭동을 야기했다.
1671년 루크 (Luque)라는 토착민 보호관은 토착민 3명과 함께 과다라하라의 고등법원을 찾아가 토착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이후 강제 노역에 동원된 토착민은 하루 2내지 2분지 1레알 (*Real: 당시 스페인 화폐단위)을 받았다.
디 아톤도(Isidro de Atondo y Antillon 1676- 1678 재임)도 역시 시나로아의 수비대장과 시장직인 알칼디를 역임했다. 1683년 디 아톤도는  영롱한 진주를 품은 푸른 조개가 지천으로 깔린 바하 반도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683년 아톤도는 스페인 황실의 지원을 받아 에우제비오 키노 신부와 고니 신부를 대동하고 정착촌 건설과 선교를 명목으로  바하로 향했다.
                       

<다음호에 계속>

N1.JPG

More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