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이 비껴간 새벽 하늘은 마침 떠오르는 붉은 햇살로 하늘이며, 떠도는 구름 그리고 잔 파도까지 황홀하게 불탔다. 희미한 안개사이로 불타는 잔파도 끝에는 산과 숲, 그리고 잎진 나목이 모습을 들어냈다.
이때 갑판을 지키던 선원이 흥분된 목소리로 “육지다!”하고 소리쳤다. 온 밤을 들이치는 파도에 시달리던 102명의 승객과 30여명의 선원들은 놀란 걸음으로 갑판으로 몰려들었다. 수풀과 나목이 가득한 육지가 가까워졌는지 벌써 물새 몇마리가 폭풍우에 이제는 걸레처럼 헤진 돛대에 앉아 “끼륵, 끼륵” 울어댔다. 실로 얼마만에 대하는 산야인가.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에서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천지 버어지니아의 허드슨 만으로 출항한 청교도와 상인들은 66일 만인 1620년 11월 9일 (일부 사료에는 1620년 11월 21일 처음 육지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드디어 신대륙의 산하를 본 것이다. 30명의 청교도들은 스피드웰 (Speedwell)호를 타고 네델란드의 라이던 항을 출항한 지 117일 만에 드디어 자유의 땅 신대륙을 보았다.
자유를 찾는 청교도들과 일확천금을 꿈꾸는 탐욕스런 상인과 모험가 102명과 30여명의 선원들은 마사추세츠의 ‘대구의 만 (Cape Cod)’에 닻을 내리기 전 11월 11일 지도자 브루스터 (William Brewster)의 인도로 신대륙까지 인도하신 절대자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시편을 인용한 찬송가를 감격스레 불렀다. 감사예배를 인도한 브루스터는 절대자께서 “시속 2마일로 항해하는 낡은 화물선 메이플라워를 주시어 신대륙으로 인도해주심에 감사했다. 그리고 대서양 한복판에서 폭풍우에 돛대가 부러지고 집채만한 파도가 갑판에 들이칠 때 침몰하지않게 지켜주심을 감사했다. 또한 선원, 동승한 모험가, 상인 1명과 여자승객 1명이 파도에 휩쓸려 사망했으나 대신 남자 아기 1명이 태어났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침몰직전에도 아무도 되돌아가자고 주장하지 않아 모두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인도해주신 절대자 주님께 감사했다.
옛부터 물고기 대구가 많아 ‘대구의 만'(Cape Cod)으로 불리우는 마사추세츠의 연안에 도착한 청교도와 일확천금을 꿈꾸는 모험가, 상인들과 그 후손들은 원주민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비버같은 동물의 모피와 바다에 널려있는 대구를 잡으며 자유의 땅 신대륙 아메리카를 오늘의 지상최대의 낙원으로 일구었다. 비버 사냥꾼들은 야성의 땅 서부를 개척하고 샌프란시스코로 안내하는 황제의 길을 냈다.
청교도를 따라 이주한 네델란드 이주자들은 비버잡이와 대구잡이로 오늘의 뉴욕에 뉴암스텔담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영국군과 맞서기 위해 뉴암스텔담에 방어용 담장을 설치하면서 뉴욕에 오늘의 월스트리트 거리가 생겨났다.
헨리 8세 이혼으로 탄생한 영국성공회
1527년 영국의 헨리(Henry) 8세가 첫번째 왕비 아라공의 캐서린과 이혼하면서 교황 크레멘스 7세는 헨리8세를 파문했다. 이에 맞서 헨리 8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세웠다. 1534년 영국의회는 헨리 8세를 영국 국교의 수장으로 선포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자 종교개혁운동은 서서히 영국으로 번졌다. 영국은 드디어 교회내의 성상을 파괴하고 전통적인 성지순례행사 폐지, 성인숭배폐지 등 전통적인 종교행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진정한 의미의 개신교도도 아니었다. 6개항의 성공회 신조를 통해 헨리 8세는 1539년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1559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영국의회는 여왕을 신앙의 옹호자로 공표하고 개신교적인 종교개혁을 배척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63년 성직자모임에서 ‘성공회 신앙고백39개조’를 제정하여 성공회를 국교로 재확인하는 한편 영국내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성공회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공존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중도적인 종교정책을 공표했다. 여왕의 이같은 정책은 급진적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칼뱅노선을 따르는 청교도들은 가톨릭 색채가 상존하는 여왕의 중도노선에 강하게 반기를 들었다.
가톨릭 색채 ‘정화한다 (Purify)’ 청교도 탄생
이들은 교회에 남아있는 가톨릭 교리를 ‘Purify’ 즉 정화하여야한다고 주장하여 청교도라고 부르는 ‘Puritan’이라는 어원이 생겨났다. 1558년 의회는 주일과 주요축일에는 의무적으로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는 강제규정을 공표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1실링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또한 타 종교의 예배에 참석할 경우 벌금과 함께 구금되었다.
1603년 즉위한 제임스 1세 (1566-1625)는 ‘왕의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더욱 가혹하게 퓨리탄 즉 청교도들을 탄압하며 과격한 칼뱅주의 청교도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청교도 지도자들은 하나, 둘 런던에서 200마일거리의 비교적 종교가 자유로운 네델란드로 몸을 피했다. 청교도들은 네델란드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통행증을 구하거나 항해하는 배를 구해 네델란드 수도 암스텔담으로 모여들었다. 한때 네델란드에는 400내지 500명의 영국에서 밀항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마을을 이루고 모여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에 청교도 이외의 개신교들도 모여들자 이들간에 분쟁이 계속되자 몇몇 청교도 지도자들은 해안가 라이던 (Leiden)으로 집단이주했다.
영국을 탈출한 청교도, 레이던에 모여살아
청교도들은 이곳에서 현지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섬유공장, 주조업, 인쇄업, 무역업에 종사하며 어렵게 생활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빈한한 생활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도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서 청교도들에게는 자라나는 2세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었다. 자라나는 2세들은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현지인들에게 동화되었다. 청교도 지도자 윌리암 브래드포드 (William Bradford)는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고 ‘종교의 자유도 누리고 영국인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무렵 네델란드의 청교도인 공동체와 영국의 일부 청교도인들 사이에는 일부 영국인들이 신대륙을 개척하려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또한 혈기찬 모험가들 몇백명이 집단으로 신대륙 개척에 나섰다가 실종되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실제 400명 내지 500여명의 모험가들이 버어지니아의 해변에 상륙한 후 현지의 포악한 원주민과 질병, 구하기 힘든 식수, 기아 등으로 간신히 40여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러한 소문때문에 청교도들의 신대륙에 대한 동경과 흥미는 점차 시들어갔다. 그러나 1616년 존 스미스 (John Smith: 1580-1631)라는 퇴역 대위가 자신이 건설한 버어지니아의 제임스 타운 (James Town)이 얼마나 이상적인 정착촌이고 신대륙은 얼마나 기회의 땅인가를 소개한 책자를 출간했다. 지도를 곁들인 이책자는 자유로운 기회의 땅을 꿈꾸는 청교도들과 모험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