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장대구로 거부가 된 이야기’에 고무된 청교도들
존 스미스는 신대륙에서 잡은 대구 ( Cod)를 염장하여 유럽에 들여와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도 한몫을 했다. 존 스미스는 자신의 책자에서 버어지니아 앞바다에는 물고기 대구가 지천으로 떠다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바가지로 몰려든 대구를 건져올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존 스미스의 책을 읽은 젊은이들이나 청교도들은 너도나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기를 꿈구었다.
청교도 젊은이 200여명이 실제 신대륙으로 향했다. 이들은 특별한 지도자도 없이 버어지니아로 향했다. 근 6개월만에 대서양을 건너 막상 버어지니아에 도착하여 이상향 제임스타운에 살아서 흘러든 젊은이들은 고작 50여명. 나머지 150여명은 대서양 항해중 사망하거나 상륙 직후 원주민에게 살해되거나 질병,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살아서 제임스타운에 흘러든 50여명의 생존자들은 목숨을 구한 것에만 감사하고 이상향을 펼 기회조차 얻지못했다.
네델란드 레이던 (Leiden)에 모여든 청교도 지도자 중에는 전직 우체국장 출신 윌리암 브루스터 (William Brewster)가 있었다. 그는 라이던에서 인쇄업에 종사했다. 그의 수제자 윌리암 브래드 포드 (William Bradford)도 빼어난 지도자였다. 브루스터는 제임스 1세의 종교정책을 비난하는 책자를 발간하자 격노한 영국의 제임스 1세가 네델란드 정부에 브루스터를 체포하여 영국으로 송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재정책임자 토마스 브루워 (Thomas Brewer)는 체포되었다. 브루스터가 체포를 피해 숨어지내는 입장이 되자 청교도들은 서둘러 신대륙 이주를 서두르게 되었다. 더구나 스페인과 네델란드 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깃들자 신대륙 이전을 더욱 서둘렀다. 그러나 이주를 꿈꾸는 청교도들은 빈한했다.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타국 네델란드지만 청교도들의 낯선 타국살이는 고달팠다. 이들은 섬유공장의 노동자 아니면 기타 제조업의 하층 노동자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대서양을 건너는 뱃삯이나 정착후 장기간 살아갈 식자재나 비품을 구할 자금은 마련할 수 없었다.
청교도 지도자 브루스터와 브래드 포드 그리고 신대륙 이주를 바빌론을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에 비유했던 존 로빈슨 (John Robinson)이 분주하게 후원자를 찾아나섰다.
허드슨 강 하구에 토지정착 허가를 받다
우선 라이덴의 지도자들은 본국 런던의 청교도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이주방법을 모색했다. 1619년 6월 지도자들은 런던 소재 버어지니아 회사와 접촉하여 허드슨 (Hudson) 강 하구 일정지역에 정착촌을 설립한다는 토지정착 허가증을 받았다. (* 영국 런던 소재 버어지니아 회사는 무역회사로 1606년 영국 제임스 1세로부터 미대륙 동부연안 식민지설립을 목적으로 토지분양권을 이양받았다. 동부연안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버어지니아로 이름지었다. 이후 버어지니아 회사는 메인주, 캐롤라이나 주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토지대금은 정착후 후불한다는 조건이었다. 이어 청교도 지도자들은 청교도들이 타고 갈 선편문제 해결에 나섰다. 엄청난 선삯을 일시불로 지불할 수있는 여유있는 청교도들은 거의 없었다. 부지런히 수소문한 결과 비교적 청교도에게 호의적인 모험가 상인 그룹과 선을 대었다. 모험가그룹 상인들은 일반 모금을 통해 선박자금 구입과 선박 임대료, 그리고 항해중 필요한 승객들의 양식과 정착에 필요한 양식, 자재문제 등을 해결했다.
우선 라이던에서 메이플라워 호가 대기중인 영국 사우스햄턴과 대서양을 횡단할 80톤급 소형선박 스피드웰(Speedwell)호를 구입하기로 했다. 라이던 거주 청교도인 블러섬 (Blossom)선장이 구입한 후 1620년 7월 라이던 항구로 끌고왔다. 스피드웰 호는 1577년 스페인과의 해전용으로 제작된 선박으로 ‘스위프트슈어(Swiftsure)’라는 이름을 달고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도 참전했다. 1605년 퇴역한 후 이름을 스피드웰이라고 개명한 후 상선으로 연안을 오갔다. 스피드웰은 신대륙 도착 1년간 대구를 잡아 염장한 후 영국으로 들여와 선박구입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었다. 메이플라워호는 북버어지니아 주선으로 모험가 상인그룹에 의해 임대했다. 신대륙에서 영국으로 돌아갈 때 값이 나가는 신대륙의 진기한 상품을 싣고간다는 조건으로 임대료를 조정했다. 이렇게해서 청교도들에게 난제로 남았던 선편과 선원, 승객들의 항해 중 양식과 정착 후의 양식 자재, 장비구입 문제와 항해에 필요한 선박문제는 해결을 보았다.
임대, 구입한 배 2척으로 대서양 횡단 계획
청교도 지도자들은 80톤급 스피드웰 호로 1620년 7월 22일 네델란드 라이던에서 청교도 30명을 싣고 런던 근방 사우스햄턴 (Southampton)항구까지 항해한 후 대기중인 180톤급 메이플라워 호와 함께 대서양을 횡단하기로 계획했다.
7월 22일 자유와 행운을 꿈꾸는 30여명의 청교도들이 떠나는 라이던 항구는 온통 눈물바다였다. 보내는 자 떠나는 자 모두 눈물의 홍수를 이루며 이별을 서러워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듯 이들은 잠시라도 더 얼굴과 체온을 나누려고 좀체 헤어질줄 몰랐다. 수배령 이후 정박중인 배에 숨어지내던 윌리암 브루스터도 재빨리 선장 레이놀드 (Reynold)가 지휘하는 스피드웰 호에 숨어들었다.
하늘은 쾌청하고 바람은 순풍이었다. 바다 먼곳까지 떠나는 스피드웰 호를 물새 몇마리가 따랐다. 30명의 청교도를 실은 스피드웰 호는 35명의 청교도와 모험가 상인그룹이 선발한 45명의 일확천금의 탐욕스런 꿈을 쫒는 모험가와 상인 등 모두 83명을 태우고 신대륙까지 동행할 메이플라워 호가 기다리는 런던 근방 사우스햄턴 항구로 기수를 돌렸다. 영국 사우스햄턴에서 대서양 건너 신대륙까지는 근 3,200여 마일. 네델란드 라이던에서 영국 사우스햄턴 항구까지는 뱃길로 324마일. 그러나 출항 얼마 후 스피드웰 호 선체에 바닷물이 새어들자 스피드웰 호는 영국 다트마우스 (Dartmouth) 항구에서 약 2주간 머물면서 누수 부분을 수리한 후 사우스햄턴에 도착했다. 스피드웰 호와 메이플라워는 애초 7월 22일 신대륙으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피드웰의 누수사고로 두 배는 8월 5일 신대륙으로 향했다. 라이던에 남아있는 청교도들은 신대륙 이주자를 바빌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대인에 비유한 존 로빈슨이 돌보기로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