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비대 주위 20마일에 흙벽돌 담을 쌓다
날이 훤하게 밝으면 작업이 시작되었다. 현장에 모인 병사와 피마 인디안들은 하루평균 1톤의 흙에서 66파운드 무게의 흙벽돌 30장을 찍어냈다. 흙벽돌을 쌓는 미장이는 강한 소노라의 햇살에 건조된 흙벽돌을 한장한장 쌓아 부속 건물과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높다란 흙벽돌 담을 쌓았다. 흙벽돌을 쌓는 인부는 하루 100스퀘어 피트 규모로 흙벽돌을 쌓았다. 요새를 둘러싼 담의 길이는 무려 20여 마일. 담을 쌓고 사령관실 등 10여 동의 부속건물 신축에는 근 6개월 여가 소요되었다. 병영을 포함해 모두 10여 개의 건물 중 사령관실과 병사들의 숙소 바닥은 흙벽돌을 깔아 평평하게 골랐다. 대신 창고나 무기고 등 부속건물의 바닥은 흙으로 거칠게 마감하여 매끄럽지가 않았다. 투박에 본격적으로 수비대가 주둔할 요새작업이 시작되자 수비대 담을 끼고 정착민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두텁게 만든 흙벽돌 건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했다. 창문은 유리창으로 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처럼 너른 황무지 투박에 수비대가 들어서자 하나, 둘 정착민이 수비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루이스 사릭 폭동 때 경작지를 버리고 산속으로 숨었던 피마 인디안의 땅을 차지하면서 양측간의 균열은 점점 심해졌다.
초기 수비대 내 거주인원은 병사포함 411명
1753년 1월이 다 갈 무렵 요새는 작전본부를 비롯하여 사령관 숙소 그리고 병사들의 숙소가 하나, 둘 완성되고 길게 둘러싼 흙벽돌 담에 있댄 요새 출입문과 높다란 감시초소도 완성되었다. 그리고 수비대의 널따란 연병장에는 황실과 수비대의 깃발이 너른 황무지를 달려온 황색바람에 힘차게 휘날렸다. 수비대에 병력이 정식으로 주둔할 무렵부터 수비대 담장안 너른 땅에는 병사를 포함하여 1756년까지 모두 411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새로 주둔한 투박 수비대에 의존하여 초라하기만 했던 황량한 피마 인디안 촌락 투박은 서서히 큰 마을로 성장했다.
수비대가 들어선 지 13년 후인 1766년 투박에는 수비대 남쪽 방향으로 49개, 그리고 북쪽으로는 11개의 큼지막한 건물이 자리했다. 이처럼 투박에 수비대가 들어서도 아파치들의 발호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아쿠카에 주둔했던 분대는 투박에 복귀했다. 소수 병력으로 무한정 넓고 긴 변방을 지켜야하는 수비대는 사나운 아파치와 캘리포니아 만을 끼고 사는 세리 부족과 맞섰다.
바다처럼 너른 평원에 외롭게 떠있는 투박 수비대 병사들은 아파치나 피마 인디안들이 쳐들어오기만 기다리지 않았다. 수비대의 기마병들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황야를 달려 평원을 떠도는 적들을 추격했다. 1752년 8월 7일 수비대 사령관 벨다레인 대위는 소노라 동쪽 변방을 헤집고 다니는 피마 폭도들을 끝까지 추격했다. 또한 1752년 9월 11일 프런테라스 수비대 병력을 지원하여 약탈을 일삼는 아파치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했다. 투박 수비대 병사들은 멀리 캘리포니아 연안과 티부룬 (Tibulon) 섬의 세리 부족 정벌을 지원했다. 1757년 11월 3일 일단의 세리 부족과 알타 피메리아의 피마 인디안이 연합하여 막달레나 (Magdalena) 남쪽의 산로렌조 (San Lorenzo) 이주민 정착촌을 약탈하고 정착민 32명을 살해한 후 마을을 불태웠다. 간신히 살아남은 정착민 일부가 구원을 요청하자 투박 수비대 병사들은 현지 수비대 병사들을 지원하여 약탈범을 추격하여 12월 30일 산타 아나 일대에서 적들을 섬멸했다. 추격전에서 부상당한 까리주사 (Manuel Ignacio Carizusa)가 끝내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토착민 지도자 주술사들 영창에 구금하고 처벌
비록 외지인에게 조상들이 내려준 비옥한 땅을 빼앗긴 피마 인디안과 약탈이 본업인 아파치, 그리고 연안에 사는 사나운 세리 부족들도 옛부터 전해진 관습과 살아온 생활방식을 쉽게 포기하려하지 않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말씀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이라고 믿는 사제들간에는 잦은 마찰이 있었다. 사제들을 비롯하여 이주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의 오랜 전통인 주술행위를 악령에 의한 미신으로 간주했다. 자연주술행위를 금하는 사제들과 이를 고수하려는 원주민간에는 마찰이 일었다. 파리라 지사를 비롯하여 예수회 사제들은 주술행위를 일삼는 주술사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쇠사슬에 묶은 채 수비대의 영창에 구금했다. 현지인 범법자 근절을 위해 수비대 내에 영창은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원주민 전래의 관습을 말살하려는 뉴스페인 당국과 오랜 관습을 지키려는 원주민간에는 평행선을 달리는 마찰만 있어 양측간의 싸움은 끝이 없었다.
이처럼 부족의 지도자급 원로가 이유없이 잡혀들어가자 자연 피마인들, 파파고 인디안 등 원주민들과 뉴스페인 정착민간 불화는 계속 되었다.
1751년 11, 12월과 1754년에는 피마 인디안들의 대규모 저항이 있었다. 안다루시아 행정당국의 처사에 불만인 힐라 강변 피마인들간에는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다. 루이스 사릭의 측근으로 1751년 폭동을 주도했던 힐라 강변에 거주하는 까마귀 깃털장식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부족장은 1756년 부족민을 선동하여 이주민들의 정착촌을 불태우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황량한 황무지에서 사냥으로 생활하는 파파고 인디안들도 약탈에 끼어들었다. 1756년 11월과 12월에 걸쳐 파파고 인디안들은 카보르카 서쪽 측면에서부터 공격을 해왔다. 난민들이 수비대가 있는 투박으로 몰려들자 에스피노자 (Alonso Espinosa) 신부는 직접 거리로 나가 난민들을 맞아들여 요새 안에 보호했다. 힐라강과 솔트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원주민들도 들고 일어났다. 프론테라스 수비대에 배속되었던 디 안자 (de Anza ) 중위는 수비대원을 지휘하여 폭도들을 끝까지 추격했다. 이후 파파고 인디안들이 저항하고 일어났다. 수비대의 병사들은 파파고 인디안의 본거지를 급습한 후 추장이 전사하자 자연 나머지 부족들도 항복했다.
병사들의 호위속에 토착민 전교에 나선 사제들
이러한 원주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너른 변방에 이주민은 계속 늘어났다. 자연 예수회같은 선교교단은 새로 개척된 변방에 정착한 이주민의 영혼구제를 위해 선교원을 신설했다. 정착민과 선교원 보호를 위해 수비대가 들어서면 인근 선교원의 사제들은 정착민 뿐만 아니라 주변 토착민에게도 하느님 말씀을 부지런히 전했다. 투박에 수비대가 들어선지 2년 후인 1754년 구에바비 예수회 선교원의 파우워 ( Francisco Pauer)신부는 부지런히 인근 인디안을 상대로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 파우워 신부의 노력으로 1754년 신년에는 마을 어린이 5명이 하느님 품에 안겼다. 영세받는 어린이들의 대부는 스페인 정착민과 수비대 병사 2명이었다. 또한 1월8일 수비대 주변 4명의 젊은이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그리고 3월28일에는 인근 선교원의 디아즈 ( Joachin Felis Diaz)신부와 합동으로 7명의 원주민을 영세했다. 이처럼 사제들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아가면서 원주민 촌락을 드나들며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
뉴 스페인 최고 북단에 위치한 수비대라고해서 별다른 혜택은 없었다. 변방이라 보급픔 조달이 용이하지않아 사령관은 직접 수비대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했다. 아파치들이 도처에서 약탈을 일삼아 군수품 업자들은 그만큼 최북단 변방까지 군수품 수송을 기피했다. 이같은 상황때문에 투박 수비대 병사들은 제대로 된 군복도 입지못하고 입대시 입었던 사복을 입은채 복무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