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중보다 저렴한 수비대 매점 물가
투박 수비대 병사들뿐만 아니라 최변방의 정착민들은 뉴멕시코 등 도시지역 주민보다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생필품을 구입했다. 상인들은 최변방까지 1,000마일 이상 먼길을 목숨을 걸고 화물을 수송했다. 상인들은 운송도중 아파치나 산적들에게 약탈당한 손실 그리고 수송마차를 호위하는 경호비용까지 소비자 물가에 전가했다. 정착민들은 자연 천정부지로 높은 물가를 감내해야했다. 변방의 정착민들의 원성이 자자하자 뉴스페인 총독관저는 변방을 거래하는 상인들은 물품 사입가에 50% 이상 마진을 붙이지 못하게 규제했다.
군수품 조달이 용이하지 않자 당국은 병사들의 일용품을 물품대신 현금으로 지불했다. 당시 병사들의 월급은 하루평균 은화 2레알 (Reales)을 지급받았다. 18세기 무렵 1레알의 가치는 1달러 당 20레알. 17세기에는 1달러당 8레알이었으나 스페인 제국이 쇠락하면서 그만큼 평가절하되었다. 당시 스페인 5페소 (Pesos)가 1달러와 맞먹었다. 당시 어느 변방 수비대의 4명의 장교와 43명의 사병, 그리고 인디안 정찰병 10명의 연봉 총계는 18,988.6레알로 기록되었다. 당시 병사 1인당 연봉은 290 페소. 변방을 오가는 상인들은 척박하고 위험한 변방에 거처를 마련하기를 피했다. 자연 수비대 사령관은 병사들을 위해 다량의 물품을 구입하고 인근 목장이나 광산의 정착민들은 수비대 매점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했다. 당시 투박수비대 매점의 물품가격은 일반 시중보다 약간 저렴했다. 1파운드의 설탕이 가미된 초코레이트는 시중보다 2레알이 저렴한 1페소 2 레알. 뉴스페인 퀘레타로 지방에서 생산되는 면직물 1야드의 값은 3페소 4레알로 시중보다 6레알이나 저렴했다. 또한 야외용 직물 망토는 10페소. 시중보다 6페소나 저렴했다. 담요는 4레알이 저렴한 4페소. 비누는 시중에서 1페소에 10개이나 매점에서는 12개에 1페소였다. 매점에서는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취급했다. 시중에서 50페소하는 가죽 갑옷은 수비대 매점에서는 40 페소, 그리고 말안장도 시중보다 1페소 저렴한 3페소였다. 또한 장총도 시중에서 30페소였으나 매점에서는 25페소에 살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정착민들이나 병사들에게 놋쇠 주전자나 영국제 또는 미라노나, 제노아산 옷감이 인기였다.
기마병 1인당 말 6마리를 소유해야
기마병들은 최소 6마리의 말을 보유했다. 투박 수비대의 기마병들이 추가로 말을 구입할 경우 사령관 벨다레인은 말 거래상을 통해 구매했다. 말 거래상들은 주로 시나로아 지방이나 그곳 남쪽의 정착촌 말목장에서 구입하여 먼 길을 달려 수비대에 공급했다. 말 거래상들은 목장에서 12페소에 구입하여 마진을 달아 수비대에 공급했다. 그러나 말 거래상이나 목동이 말을 몰고 먼 거리를 오려면 운송도중 헤실이 많았다. 사나운 아파치나 세리부족은 운송하는 말무리를 추격하여 약탈하거나 목동을 살해하고 말을 몰고 사라졌다. 이처럼 말을 약탈당해도 말 거래상은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었다. 당시 말 거래상인은 말 구입가격의 40%까지 마진을 붙일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총독의 법령에 의해 금했다. 이처럼 아파치나 세리부족에 의해 말을 약탈당하자 수비대 병사들이 운송하는 말을 경호했다. 그러나 이것도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경호병사들이 휴대하는 무기가 손상되었을 경우 보상문제 그리고 경호병사들의 추가 노임 등도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기마병사들은 자신의 봉급으로 말의 관리비를 지출하고 안장이나 고삐 등 마구를 마련했다. 이러한 경비도 월급에 포함되었다. 투박 수비대가 근 300여 마리의 말을 보유할 당시 말을 보급하는 소노라 지방의 말 시세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말이 흔하다보니 늙어 도축되는 말고기 값은 저렴했다. 말 고기값이 저렴하므로 말 거래상은 운송도중 말이 사망해도 손실 보상에는 큰 도움이 되지못했다. 당시 한 마리의 말 시세는 12페소. 그러나 이미 말의 효용가치를 아는 피마 인디안이나 아파치, 그리고 세리부족에게 정착민이나 선교원의 말은 좋은 표적이었다.
벨다레인 사제의 천거로 수비대장에 임명
투박 수비대의 초대 사령관 벨다레인 (Juan Tomas Beldarrain) 대위는 1752년 3월 26일 병사 50명을 선발했다. 1752년 4월 1일부터 50명의 병사들을 지휘, 산타아나 (Santa Ana) 일대에서 병사들과 함께 순찰 및 경비업무를 시작했다. 파리라 지사가 1752년 6월 2일 투박을 변방 최초의 수비대 주둔지로 낙점하자 벨다레인 사령관은 병사들과 함께 투박으로 이동, 피마 인디안 부락에 임시 야영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파리라 지사의 명령에 따라 병사 30명을 지휘하여 흙벽돌을 찎어내고 말린 후 수비대 주위에 타원형 모양의 20여 마일에 달하는 방어벽을 쌓았다. 그리고 병사들의 병영을 비롯한 지휘관실, 사령관 숙사, 그리고 창고, 무기고, 성당 등 10여채의 부속건물을 지었다.
벨다레인 (Juan Tomas Beldarrain) 대위는 1718년 12월 20일 생으로 33세의 원숙한 나이에 투박 초대 수비대장이 되었다. 그는 초급 장교시절부터 피메리아 알타의 최변방에서 피마 인디안이나 아파치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면서 젊은 날을 보냈다. 마침 벨다레인이 피메리아 알타에서 근무할 때 피메리아 알타의 예수회 선교원 실태를 감사하러 방문한 발타사르 (Juan Antonio Balthasar) 신부를 수행했다. 천성이 신중하고 품성이 온화한 벨다레인은 진심으로 발타사르 신부를 보좌했다. 이처럼 신중하고 겸손하고 신심이 두터운 젊은 벨다레인의 인품은 발타사르 신부에게 깊게 각인되었다. 뉴스페인의 기게도 총독겸 남작이 피메리아 알타에 수비대 신설을 자문할 때 발타사르 신부는 주저없이 이제는 대위가 되어 인근 수비대 대장인 벨다레인을 사령관으로 적극 추천했다. 당시 벨다레인은 파리라 지사의 측근으로 인근 수비대의 대장이었다. 그러나 신설수비대의 대장직을 놓고 1752년 1월 5일 아리바카 전투에서 2,000여명의 피마인디안 폭도를 폰테스 중위가 지휘하는 기마병과 연합하여 격파하고 영웅으로 칭송받던 우레아 (Bernado de Urrea) 오포데포(Opodepo) 민병대 중위가 경쟁자로 나섰다. 그러나 이미 발타사르 신부가 총독에게 천거하고 총독은 내략한 이상 신설 수비대 대장은 벨다레인 대위에게돌아갔다. 우레아 민병대장은 1710년 쿠리아칸 (Culiacan) 태생으로 오늘의 노갈레스 근방 아리조나라는 토착민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리조나라는 의미는 피마 인디안 말로 “작은 내가 흐른 곳”으로 피마 인디안은 이곳을 아리조나 라고 불렀다. 우레아는 이곳에서 “아리조나 (Arlzona)”라는 간판을 내건 목장을 경영하고 이후 이같은 이름을 인용하여 아리조나 주가 탄생했다. 우레아는 1736년 이 마을에서 은광이 터지자 마을 사법행정관이 되어 일확천금을 노리고 몰려든 탐욕자들로부터 마을의 질서를 지켰다. 이후 오포데포 (Opodepo) 마을의 민병대장으로 아파치나 무법자들로부터 마을을 지켰다. 우레아는 또한 루이스 사릭의 2,000 피마인디안 폭도를 아리바카의 대평원에서 폰테스 중위의 정규 기마대와 연합하여 격파했다. 우레아는 아리조나라는 지명을 최초로 사용하여 대중에게 알렸다. 우레아는 이후 피메리아 알타에서 두번째로 세워지는 수비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