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싣고온 노다지 광물 쓰레기로 밝혀져
정착민들은 틈만 나면 주변의 땅을 뒤지며 노다지 찾기에 바빴다. 이들은 다이아몬드나 노다지로 보이는 토양은 무조건 쓸어담았다. 9월 말 성급한 일부 정착민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틈타 그간 소중히 모았던 광물을 범선에 싣고 까르띠에의 허락도 없이 프랑스로 배를 몰았다. 그러나 프랑스에 도착 즉시 확인한 결과 애써 가져온 광물은 다이아몬드나 노다지가 아닌 석영이거나 가치가 없는 조잡한 무용지물로 밝혀졌다.
9월 7일 까르띠에는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아나섰다. 까르띠에와 일부 탐험대원과 원주민은 긴 보우트를 타고 10월 2일 오늘의 몬트리얼인 호첼라가에 도착했다. 다음날 3일 일행은 강변에 올라 휴론족인 이로쿼이 부족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호첼라가를 둘러싼 높다란 산을 ‘마운트 로이얄’이라고 불렀다. 까르띠에와 일행은 다시 보우트를 저어 오늘의 오타와 (Ottawa)로 향했다.
까르띠에가 장기간 정착촌을 비운 사이 그간 의적이었던 휴론 부족들의 태도가 변했다. 이들은 더 이상 까르띠에의 정착촌을 찾지 않았다. 이로쿼이 부족들이 그토록 좋아하던 철제 도끼나 칼과 모피를 교환하러 오지않았다. 그리고 물고기잡이나 사냥에 동행을 권하지도 않았다. 대신 악의가 가득찬 표정으로 정착촌 주변을 맴돌거나 정착촌 내부를 염탐하듯 기웃거렸다. 얼마 후 이로쿼이족들은 갑자기 정착촌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창과 끝이 뭉툭한 나무몽둥이, 활로 무장한 이들은 괴상한 소리와 함성을 지르며 횃불을 들고 공격했다. 정착민들도 장총과 이동식 대포로 응사했다. 그러나 몰려온 적에 비해 정착민은 중과부적이었다. 35명의 정착민이 휴론족인 이로쿼이족 습격으로 사망했다. 까르띠에가 호첼라가에서 고르지 못한 기상과 거친 급류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정착촌은 불에 그을린 요새, 부서진 거처 등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같은 참상에 충격받은 까르띠에는 더이상 총대장 레버발을 기다리지 않고 대원들의 성화에 못이겨 서둘러 철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간 모아놓은 12부셀이나 되는 돌과 금속들이 귀한 노다지인가 확인하기위해 범선에 실었다.
총대장 로버발 장군과 후발부대는 좀체 도착하지 않았다. 싣고온 양식도 바닥을 보였다. 더이상 버티기 힘든 까르띠에는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1542년 6월 이로쿼이 부족의 추장과 몇몇 전사대장이 떠나는 까르띠에 일행을 배웅했다.
정착지 포기하고 귀국을 택한 까르띠에
로마 가톨릭에서 이미 신교인 칼빈 추종자가 된 총사령관 레버발은 병사들을 새로 모으고 화기 등 대포와 추수때까지 버틸 양식 등 식민지 건설에 필료한 물자를 부지런히 준비했다.
1542년 4월 16일 신세계 식민지 사령관 레버발은 그간 마련한 대포 등 화기 와 양식, 정착지에서 키울 소나 양 등 가축과 기타 자재를 실은 범선 3척을 지휘하여 로쿠 (La Rocque)항을 출항했다. 그간 북대서양에는 갑자기 사라진 레버발을 생포하기위해 스페인 선단이 너른 바다를 뒤지고 있었다. 레버발의 선단은 세인트-존을 지나 뉴펀드랜드에서 마침 프랑스로 되돌가는 까르띠에와 마주했다. 사령관인 자신의 허락없이 정착지를 임의로 떠난 까르띠에에게 레버발은 노했다. 그리고 까르띠에게 근무지로 되돌아가 자신을 보좌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까르띠에는 스타다꼬마 원주민족의 공격을 예로 들면서 이미 귀한 광물을 양껏 수집해 거부가 될 것을 확신한 까르띠에는 더이상 식민지 건설에 참여하지 않겠고 복귀를 거절했다.
깊은 밤, 까르띠에는 12부셀의 모아놓은 금속과 돌조각을 실은 배를 몰고 조용히 뉴펀드랜드 항구를 빠져나와 프랑스로 뱃머리를 돌렸다.
레버발 까르띠에가 포기한 정착지 다시 장악
신천지 북 아메리카의 뉴프랑스에 도착한 레버발은 세인트-로렌스 강줄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이미 까르띠에가 포기한 정착지를 다시 장악했다. 레버발은 동행한 병사들과 정착민을 지휘하여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정착지를 정비했다. 그리고 그간 왕립 찰스보로그 (Charlesbour- Royal)라고 부르던 정착지는 프랑스-로이 (France-Roy )로 지명을 바꾸고 세인트 로렌스 강은 프랑스 프라임으로 바꾸었다. 레버발은 이로쿼이 휴론족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요새를 복구하고 스타다꼬마의 이로쿼이휴론 부족의 협조로 식량자급을 위해 서둘러 파종했다.
1542년 레버발 장군이 처음 겪는 추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까르띠에가 이미 겪은 괴혈병으로 대원 50여명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이미 이 병을 경험한 까르띠에는 레버발 장군에게 도나꼬마 추장이 전해준 가문비나무 발효된 추출물치료법을 레버발장군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노다지 향신료의 땅 중국’으로 가는길을 찾다.
어느새 끔직했던 겨울이 지났다. 봄이 되자 레버발은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섰다. 70명의 건장한 병사와 정착민은 8개의 선체가 긴 보우트에 나누어 타고 호체라가 (Hochelaga)로 떠나 노다지와 향신료의 땅 중국이 있다는 북서쪽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아나섰다. 마침 까르띠에의 발걸음을 막았던 급류가 레버발의 발길을 막았다. 레버발은 정착촌에서 데려온 병사와 원주민 그리고 호첼라가 현지에서 고용한 현지인들에게 긴 보우트를 어깨에 메고 급류를 거슬러 오르도록 무리하게 강요했다. 거친 물살을 이기지못하고 8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났다. 간신히 스타다꼬마 정착지로 돌아온 레버발에게 마침 프란시스 1세가 보낸 신선한 식재료와 양식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같은 기쁨도 잠시. 뒤미쳐 큰 전쟁에 말려든 프란시스 1세는 급히 레버발과 그의 식민지 전대원에게 본국 소환령을 내렸다.
1543년 가을 레버발과 식민지 전 대원이 귀국하므로 프란시스 1세의 북 아메리카 대륙 신프랑스 영토 식민지의 원대한 꿈은 2년 반만에 한낯의 꿈이 되었다. 레버발은 1560년 파리에서 그와 같은 칼빈 교도에 의해 살해당해 만 60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부드러운 황금’비버 모피 대륙의 지형을 바꾸다
한편 허접스런 돌덩이와 금속류에 현혹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던 쟈크 까르띠에는 노다지로 믿었던 광물질과 돌덩이가 쓰레기같은 무용지물로 밝혀지자 허탈감에 한동안 낙담으로 세월을 보냈다. 1491년 12월 23일 세인트 말로에서 태어난 까르띠에는 1557년 9월1일 태어난 고장에서 영면했다. 생전 그가 탐험한 뉴프랑스인 오늘의 캐나다 로렌스 만과 로렌스 강 연안을 그린 지도와 3차례에 걸친 그의 불굴의 탐험정신은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레버발의 뉴프랑스 건설이 좌절된 후 극소수 프랑스 모피사냥꾼들이 세인트 로렌스 만을 기웃거리며 원주민 퍼어스트 네이션 부족과 간간히 모피교역을 하면서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프랑스 정부가 100여개의 군소 모피무역상을 묶어 신 프랑스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에 모피무역 독점권을 주면서 모피 무역왕 사무엘 디 상플랭 (Samuel de Champlain)이 등장하면서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대영제국과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면서 ‘부드러운 황금’ 비버모피’는 신대륙 아메리카의 지형을 바꾸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