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 서쪽 하늘은 하루를 마감하는 붉은 햇살에 물든 오색 구름이 용트림하듯 흘렀다. 프런테라스 (Fronteras) 수비대장 디 안자 보우티스타 1세 (de Anza Bautisa sr) 대위는 몇몇 호위병들과함께 자작나무가 울창한 오솔길을 지났다.
서쪽 하늘을 가득 채운 황홀한 구름을 바라보며 눈부신 듯 디 안자 대위는 잠시 눈쌀을 찌푸렸다. 뒤따르는 병사들보다 한참 앞선 듯 기마병들의 말밥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위는 깊은 심연처럼 고요했다. 한낮의 더위에 지쳤는지 새소리조차 멈춰있었다. 자작나무 사이 오솔길을 한참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자 시야에는 가릴 것 없는 너른 황무지가 펼쳐졌다. 황홀한 구름떼 아래 캘리포니아 만을 건너온 5월의 바람을 타고 싱그러운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디 안자 대장은 마음껏 바다 내음을 들어마시며 옆을 따르는 호위병에게 눈길을 주었다. 순간 정말 눈깜박일 사이도 안되는 순간 자작나무 숲 사이로 “힉” “휙”하는 낮은 괴성이 울리면서 한 떼의 벌거벗은 아파치들이 끝이 뭉툭한 몽둥이와 조잡한 창를 들고 디 안자 대장과 호위병, 그리고 함께했던 병사들을 덮쳤다.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순간적인 일이었다. 몽둥이를 휘둘러 디 안자 대장을 제압한 아파치들은 디 안자 대장과 호위병들의 머릿가죽을 벗긴 후 붉은 선혈이 낭자히 흐르는 머릿가죽을 치겨들고 괴 소리를 내며 포효했다. 이 순간 디 안자 대장의 부인이며 6자매의 어머니인 마리아 로사 (Maria Rosa)는 여느 병사의 아내들처럼 순찰 업무에 나선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부지런히 묵주알을 돌리고 있었다. 한편 만4세가 채 못된 5째 디 안자 2세는 손위 형제와 누이들과 허연 먼지가 이는 수비대 연병장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미지의 땅 캘리포니아 탐험을 위한 보급로를 찾아 길을 나선 디 안자 대장은 1740년 5월 9일 가족이 머무는 프런테라스 요새에서 96마일 거리 소암카 (Soamca)의 자작나무 숲에서 이렇게 운명을 달리했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주변에는 1년 후인 1741년 테레나테 (Terrenate) 수비대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5째 아들 디 안자 2세는 사후 근 30년 후인 1776년 1월 4일 샌프란시스코 만에 스페인 황제의 깃발을 날렸다.
바스크 (Basque)를 떠나 기회의 땅 신세계로
디 안자 1세는 스페인과 남부 프랑스 국경 근방의 바스크 (Basque)부족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12세기 나바레인 (Navarrein)의 이베리아 왕국에 뿌리를 둔 귀족가문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바스크 지방의 귀푸즈코아 산과 계곡에 흩어져살았다. 디 안자 1세의 4대조 할아버지 마아틴 디 안자 (Martin de Anza)는 베라스티귀이 (Berastegui) 마을에 정착해 살았다. 그러나 그의 증조부 주아네스 디 안자 (Juanes de Anza)는 헤르나니 (Hernani) 마을 근방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곳에서 디 안자의 아버지는 뿌리를 굳게내려 1639년 7월 23일 디 안자 1세가 5자녀 중 두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 중에는 이후 사제, 상인과 그의 가문과 전 영지를 상속받은 누이 마리아 에스테반 (Maria Esteban)이 태어났다. 디 안자는 19세가 되자 1712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많은 야망을 이루기위해 신천지 뉴스페인을 향해 거친 대서양을 건넜다. 당시 집안의 가문을 딸에게 상속하기는 드문 일이나 디 안자의 아버지는 상속자로 딸을 택했다. 형제들 중 오직 디 안자만이 유복한 집안환경을 떨쳐버리고 모험을 택했다. 그가 뉴스페인 땅을 밟았을 때 이미 신천지 뉴스페인에는 바스크족 특유의 혈연관에 기대어 서로 돕고 밀어주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사업, 금융업, 관료사회, 종교계까지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디 안자가 뉴스페인 땅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하지못했다.
더많은 부와 영예를 위해 변방에 정착
야심찬 젊은 사나이 디 안자는 다른 이주자들처럼 일확천금이 용이한 은광을 찾아 최북단 변방으로 말을 몰았다.
그가 소노라를 찾았을 때는 1718년. 근 6년간 신천지에서 주변을 탐색한 디 안자는 부와 영예를 단숨에 이루려면 변방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했다. 1720년까지 디 안자는 소노라의 헤르모시요 (Hermosillo)의 남쪽에 위치한 아과제 (Aguaje)와 아리즈페 (Arizpe)의 남쪽 테투아치 (Tetuachi)에서 소규모 은광과 상점을 경영했다. 디 안자는 모자라는 수입은 이후 장인이 된 안토니오 베제라 니에토 (Antonio Bezerra Nieto)를 수행하며 보충했다. 베제라 니에토는 당시 치와와 (Chihuahua)의 야노스 (Janos)수비대 대장으로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1718년 디 안자는 소노라 일대 감찰에 나섰던 베제라 니에토 야노스 사령관을 만났다. 디 안자의 베제라 니에토 사령과의 만남은 디 안자의 일생에 일대변기를 마련했다. 니에토의 만남 이후 디 안자는 그간 운영하던 은광사업을 처분하고 니에토 사령관의 권유와 추천으로 야노스 수비대의 기마병이 되었다. 천성이 신중하고 과묵한 디 안자를 눈여겨 본 니에토 사령관의 추천으로 바스크 귀족 출신인 디 안자는 수비대의 소위로 진급하고 이어 치와와 지역의 지방 판사겸 시장직위에 올라 1721년까지 근무했다. 이어 디 안자는 프런테라스 수비대의 임시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변방 소노라로 재배치되기 전인 1721년 사령관 베제라 니에토의 딸 마리아 로사 (Maria Rosa)를 아내로 맞으면서 바스크 부족사회의 주요인사들과 연을 맺어 남보다 빠르게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땅에 처음 발을 디딘 19세 때까지 바스크 족 언어만 사용하고 스페인 언어를 전혀 할 수없던 스페인 변방 바스크족 청년 디 안자는 뉴스페인 도착 근 14년만인 1726년 프런테라스 수비대의 임시 사령관이 되고 또한 야노스 수비대 사령관 딸 마리아 로사 (1697년 출생~1760년 사망)와 결혼하여 사회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이주 14년만에 사령관 딸과 결혼후 사령관에 임명
마침 황실의 비밀 감찰이 소노라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프론테라스 수비대 사령관 그레고리오 투논 (Gregorio Alvarez Tunon y Quiros)은 예수회 선교원을 등에 업고 토착민을 무차별적으로 농노로 부려 원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그는 일단의 이주민을 활용하여 황실에 선교원의 사제를 모함한 후 선교원의 농지를 불법으로 착복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근무에 태만하면서 수비대의 공금도 착복했다. 심지어 이미 사망한 병사의 봉급을 착복하는가 하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이러한 사령관의 태만은 적인 아파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프런테라스 수비대는 적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어 아파치의 침공은 그만큼 거셌다. 마침내 1726년 황실의 명령으로 페드로 디 리베라 (Pedro de Rivera ) 장군은 프런테라스 수비대를 비롯하여 소노라 일대의 대대적인 비리 감찰에 나섰다. 감찰결과 악명높은 투논 퀴로스를 해직하는 한편 부패한 선교원의 사제들과 그레고리오 투논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디 안자 1세는 임시사령관을 수행하다 얼마 후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신임 사령관 디 안자 1세가 부패한 내부를 정리하고 수습하는 사이 마리아 로사는 장남 프란시스코에 이어 장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마리아 마뉴엘라, 마리아 게르티루디스, 조세파 그레고리아, 그리고 1776년 1월 최초로 캘리포니아에 이주민을 정착시킨 디 안자 2세를 두었다. 정숙한 마리아 로사는 남편 디 안자 1세를 정성으로 내조하는가 하면 일생 사나운 적들과 대결하며 생활하는 사령관 디 안자 1세의 무사를 위해 하루내내 묵주를 손에서 놓지않고 기도속에서 생활했다. 디 안자 1세의 부임 이후 프런테라스 수비대를 중심으로 알타 소노라 일대에는 점차 질서를 회복하고 그만큼 외적인 아파치의 약탈도 줄었다. 이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편 소노라 일대를 관장하는 예수회도 신임 프런테라스의 수비대 사령관을 충심으로 환영했다. 이미 변방의 이주민 사회는 디 안자 1세의 신심과 인품에 대해 호의적이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