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미지의 땅’ 알타 캘리포니아로 가는 보급로를 찾아라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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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지꾼 400여명이 은괴찾아 산비탈 뒤져 
디안자가 산비탈에 도착했을 때 은괴가 발견된 산비탈에는 약 400여명의 노다지꾼들이 혈안이 된 채 산비탈을 헤집고 있었다. 디안자 수비대장은 불법으로 은괴를 수집하는 노다지꾼들에게 즉시 작업을 중단하라고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했다. 그리고 400여명의 노다지꾼들이 수집한 은괴를 동행한 병사들에게 압류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노다지꾼들이 작업하던 현장에 보초를 세우고 허가없이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현장을 파악한 후 디안자는 12마일 밖 우레아의 목장으로 달려가 인근 주민들이 불법으로 채취한 은괴를 압수했다. 특히 디안자는 알마잔(Jose Fermin de Almazan)이 채취한 후 보관중이던 무려 무게가 1.25 톤에 달하는 은덩어리를 무사히 압수했다. 그리고 디안자는 우레아의 아리조나 목장에 일주일가량 머물면서 은광에 대한 행정조치 16개에 서명한 후 공표하고 또한 상급기관에 보고했다. 그리고 은광이 있는 야산주변에 엄히 보초를 세운 후 일주일 후 프런테라스 수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1737년 신년에 들어서자 엄청난 은광소식을 전해들은 총독관저의 부총독겸 재무관 암브로시오 멜가레호 (Ambrosio Melgarejo)는 이번 소동의 주인공 은괴는 옛 토착민들이 비밀리에 제련한 후 은닉한 것이라고 판정했다. 부총독의 이같은 판정으로 지금까지 수집한 은괴는 모두 황실의 소유가 되었다. 이같은 책략으로 부총독은 총독의 측근이 되어 영광의 출세길를 달렸다. 
1737년 9월 17일 부총독 멜가레호의 아들은 오덴시아의 수석판사가 되고 이어 최고재판소의 판사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1737년 6월 8일 총독 후앙 안토니오 (Juan Antonio de Vizarron y Euiarreta)는 디안자 수비대장에게 은괴소동의 진원지를 다시한번 정밀 탐색하라고 명령했다.

소동 1년 후 야퀴이 인디안 광권을 획득
디안자는 소노라 일대의 유능한 노다지꾼 5명과 함께 1737년 8월과 9월 2개월에 걸쳐 정밀조사했다. 그리고 이번 소동의 주인공 은괴는 자연스레 은광맥에서 노출된 것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광권을 신청한 노다지꾼들의 주장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야퀴이 인디안 안토니오가 땅에 묻힌 은괴에 발이 걸려 넘어진 지 꼬박 1년이 가도록 소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 소동에서 은괴를 수집하고 광권을 소유했던 노다지꾼들은 자연 당국의 조치에 항의하고 디안자의 광산주변 접근을 금하는 명령을 취소하라고 나섰다. 디안자는 항의하는 노다지꾼들에게 사과하고 황제의 몫 20%와 조사비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유자의 몫으로 인정했다. 은괴에 발이 걸려 넘어졌던 야퀴이 인디안 안토니오 시라무에아 (Antonio Siramuea)는 은괴의 진원지 소노라 북쪽 산비탈의 1,440 스퀘어 피트의 광권을 정식으로 획득했다.

광산일대 산 파두아 대신 아리조나로 불러
야퀴이 인디안 노다지꾼이 자연 노출된 은괴덩어리에 발이 걸려 넘어진 이후 외딴 작은 야산을 중심으로 노다지에 혈안이 된 이주민을 비롯하여 토착민까지 곡괭이를 메고 몰려들었다. 이후 사람들은 은괴가 지천으로 깔린 이 노천 광산일대를 디안자가 지은 산안토니오 디  파두아 (San Antonio de Padua)라는  이름대신 아리조나 (Arlzona)라고 불렀다. 1863년 아무도 돌아보지않는 야성의 대서부 아리조나가 미국 연방영토로 선포되자 당시 대통령 링컨은 여러 후보 이름 중에서 아리조나를 낙점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은괴가 발견된 야산에서 12마일 거리의 노갈레스 서쪽지방을 당시 피마 인디안들은 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아리조낙 즉 “Alizonac”이라고 불렀다. 또한 파파고 인디안들은 알레 존, 즉 ‘Aleh Zone’으로 불렀으나 베르나도 디 우레아가 이곳에 목장을 세우고 ‘아리조나 목장’ 간판을 내걸면서 아리조나의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디안자는 자신을 보좌하는 민병대 대장이며 아리조나 목장의 주인인 우레아의 집에 머물면서 16개의 조사서에 서명한 후 연락관을 통해 지사에게 보고했다. 이곳에서 다량의 은괴가 발견된 후 이지역은 자연스레 아리조나로 불리게되었다. 
1846년~1848년 멕시코와 미국간의 전쟁 후 1854년 가드슨 퍼체이스(Gadson Purchase)조약으로 미국이 노갈레스와 아리조나 일대를 손에 넣게되자 자연 아리조나라는 지명은 널리 사용하게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지명에 따른 이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본래 소노라 일대를 비롯한 뉴스페인에는 스페인에 저항하는 바스크 부족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디안자도 역시 바스크족 출신이다. 바스크 언어로 Ariz는 “참나무” 그리고 Ona는 “좋다’라는 의미. 당시 아리조나 마을 주변에는 잘 빠진 참나무가 널려있었다한다. 소노라 일대에 퍼져있는 바스크인들은 잘 자란 참나무를 보고 고향 바스크 지방의 아름다운 참나무를 연상하며 이곳을 ‘아름다운 참나무가 있는곳’이라 하여  Arizona 즉 ‘아름다운 참나무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 이후 소노라의 아리조나 일대에 노다지꾼들이 몰려들자 아리조나 목장 주인 우레아는 지역의 치안을 전담하는 민병대 대장이 되었다. 
1740년 피마 인디안 루이스 사릭이 폭동을 일으키자 민병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알타 소노라 수비대가 신설되자 베르나르도 디 우레아는 초대 수비대 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디안자 1세 프런테라스 수비대장에게 내린 행운은 1740년 5월 9일까지였다. 5월초 디안자 수비대장은 소노라 지역을 포함한 오우덴시아 지사를 통해 총독에게 콜로라도 강건너 알타 캘리포니아를 탐험할 수 있는 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알타 캘리포니아에는 동부지역에서 모피사냥을 위해 로키산맥을 넘어온 사냥꾼들이 아파치 인디안들과 장총과 모피를 비밀리에 교환했다. 아직도 금단의 땅으로 알려진 알타 캘리포니아는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까브리요가 산디에이고에 발을 디딘 스페인 황실의 영토였다. 로키산맥을 넘어 아파치와 무기를 거래하는 불법이주자 단속과 이주민 정착을 위해 캘리포니아를 개척해야된다는 여론이 뉴스페인 이주민 사회에는 비등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디안자 1세는 알타 캘리포니아 탐험은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5월초 디안자 수비대장은 일부 병력을 인솔하고 구에바비를 거쳐 콜로라도 강을 건너 알타 캘리포니아로 가는 탐험대의 보급품을 운송할 보급로 확보를 위해 길을 나섰다.
디안자는 막내 디안자 2세를 안고 작별인사하는 마리아 로사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앞장서서 말을 타고 수비대의 정문을 나섰다. 이것이 두 사람간의 마지막 인사였다. 소암카의 자작나무 숲을 벗어날 무렵 잠복했던 아파치들의 공격으로 디안자와 경호병들은 비참하게 머릿가죽이 벗긴 채 살해되었다. 
그리고 3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후 투박 수비대의 사령관이 된 디안자 2세는 아버지 디안자 1세가 못이룬 꿈을 240명의 캘리포니아 이주민을 이끌고 안개 자욱한 캘리포니아 만에 수비대를 세우고 정착민을 이주시켰다. 1776년 3월이었다. 

필자의 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연재를 중단합니다. 빠른 시일내에 수달의 일종인 비버 (Biever)사냥꾼에 의해 북미대륙에 몰려든 황금 노다지꾼들같은 모피사냥꾼에 의해 북미주가 개척되는 이야기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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