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 유럽의 탐욕스런 열강들은 인간의 발길이 미처 닿지않은 신세계 광활한 북미대륙을 차지하려 몰려들었다. 이미 교두보를 마련한 측은 이를 빼앗으려는 측과 밀고 당기는 살육전을 폈다. 신대륙을 둘러싼 인근 바다에는 풍랑을 뚫고 몰려든 해적들과 약탈한 금은보화를 지키려는 열강들이 목숨을 건 쟁투을 벌였다.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자들은 오직 힘에만 의존한 채 생존하려 발버둥쳤다. 강대한 제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은 정의였던 세월이었다. 외지인의 발길이 미처 미치지않던 미주대륙에는 이를 지키려는 원주민과 이를 더 차지하려는 유럽열강들이 서로 연대해서 피 튀기는 싸움으로 날을 지샜다. 이러한 열강들의 싸움은 남미와 멕시코를 너머 점차 북미주, 그리고 알타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캐나다에서 비버모피 교역으로 재미를 본 프랑스를 비롯하여 해양을 제패한 여력으로 아시아 대륙에서 향신료를 독점한 네델란드는 그 탐욕스런 발톱을 북미대륙으로 넓혔다. 뒤늦게 해양강국이 된 대영제국은 버어지니아와 매사츄세트에 뉴잉글랜드라는 정착촌을 마련하고 맹렬한 기세로 프랑스와 네델란드를 미지의 땅 북미주에서 몰아냈다.
대서양을 통해 북미대륙의 동부지역을 선점한 일부 유럽 열강은 원주민과 비버모피같은 특산품을 교역했다. 그러나 미주대륙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가로막은 로키산맥은 외지인들에게는 정복할 수 없는 엄청난 장애로 광활한 서부 대평원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다. 유럽 대륙의 모피시장을 독점했던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모피 자원이 고갈되자 질좋은 모피를 찾아 알라스카를 지나 캘리포니아 연안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구미 열강이 태평양 해안을 통해 알타캘리포니아를 넘보자 자연 긴장한 스페인은 당시 거대한 섬으로 알려졌던 알타캘리포니아가 거대한 대륙으로 알려지자 너나없이 유럽열강은 미지의 땅 알타캘리포니아 진출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중에서 멕시코 제국을 장악하고 뉴스페인을 세운 스페인은 최변방 소노라와 피멜리아와 맞닿은 알타캘리포니아를 선점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려 진군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산디에이고 만에 유럽인 최초로 정박한 까브리요
대서양 연안해변을 중심으로 뉴잉글랜드에 영국인 정착촌이 형성되기 앞서 캐나다에는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정착촌이 형성되면서 북미대륙에는 유럽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좀체 대서양을 통해 태평양에 이르는 바닷길을 찾지못하면서 알타캘리포니아는 유럽인들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다. 이러한 미지의 땅인 태평양 연안 캘리포니아에 유럽인의 발길이 들어선 것은 16세기 중반. 유럽의 강국 스페인이 필립핀을 정복한 후 뉴스페인인 멕시코의 중간 기착지를 태평양 연안 북미대륙에 마땅한 항구를 찾으면서 시작됐다.
알타캘리포니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유럽인은 포르투갈 태생이며 스페인 시장바닥을 떠돌던 고아출신 까브리요(Juan Rodriguez Cabrillo). 당시 스페인 왕실은 필리핀 마닐라를 떠나 멕시코를 오가는 상선의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연안에 마땅한 항구를 찾던 스페인 왕실은 까브리요에게 캘리포니아 연안해도를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1542년 9월 28일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의 경계근방에 기항한 까브리요는 쾌적한 만에 배를 정박하고 이곳을 스페인 왕실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이곳이 오늘날의 산디에이고이다. 그리고 쿠메이야 (Kumeyaay)원주민들의 땅인 이곳을 산 미구엘 (San Miguel)이라고 불렀다. 그는 오늘의 캘리포니아 소노마와 멘도시노 연안까지 항해했으나 짙은 안개와 때마침 몰아친 폭풍으로 샌프란시스코 만은 발견하지못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산미구엘 섬에서 하선하던 중 판자에 박힌 못에 정강이를 찔린 후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악명높은 해적, SF만 일대 영국영토로 선언
그리고 37년의 세월이 지났다.
영국의 악명높은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 (Francls Drakes: 1540년 경 출생-1596.1.28 파나마에서 사망)가 유럽인으로는 까브리요에 이어 알타캘리포니아의 태평양 연안에 상륙했다. 남미 해안을 휩쓴 후 태평양 연안을 끼고 북상한 드레이크 해적은 오늘의 오레곤 주의 쿠우스 (Coos)만을 조망한 후 다시 태평양 연안을 끼고 남하했다. 드레이크의 해적선은 1579년 6월17일 오늘의 샌프란시스코에서 35마일 거리의 캘리포니아 머린 카운티의 드레이크 만의 후미진 곳에 선박 수리차 정박했다. 그들이 머문 지역을 “드레이크, 뉴 알비용(Drake, New Alvion)”이라고 부른다. 1577년 황금색 암사슴 호를 타고 영국을 출발한 프란시스코 드레이크는 대서양을 지나 아메리카 연안을 따라 1578년 남미 브라질에 도착했다. 드레이크 해적일당은 그해 8월 21일 마젤란 해협에 들어선 지 16일만에 해협을 통과한 후 태평양에 진입했다. 드레이크 해적일당은 태평양 근해에서 뉴스페인 측의 보물선을 약탈하고 해적선을 수리하려 샌프란시스코 내륙 뉴알비용 연안에 정박한 후 원주민 미워크 (Miwokos)족과 어울려 몇주간 머물렀다. 드레이크의 부하는 금속 판에 스페인 령 이외의 모든 영토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토라는 글을 새기고 이를 현지에 남겼다. 드레이크는 북 아메리카 연안에서 대서양에 직접 이르는 뱃길을 찾지못했다. 드레이크는 1579년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립핀에서 식수를 조달한 후 인도양을 지나 아프리카를 돌아 2년만에 대서양을 통해 1580년 9월26일 해적선 황금색 암사슴 호에 보물을 가득 싣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환영나온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후 귀족 칭호를 받은 해적 드레이크는 해군을 지휘하여 스페인과의 해전에서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산미구엘 만에서 산디에이고로 개명하다
까브리요가 산디에이고 만에 기항한지 60여년의 바람같은 세월이 흘렀다. 국제 무역상 비즈까이노 (Sebastian Vizcaino)는 왕실로부터 캘리포니아 연안 해도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즈까이노는 1602년 3월7일 산디에이고 (San Diego)호와 산토마스 (San Tomas)호, 그리고 프리깃드 함 트레스 레이에스(Tres Reyes)와 긴 보우트 등 4척의 선박을 이끌고 캘리포니아 연안 탐험에 나섰다.
마침 산디에이고 디 알칼라 성인의 축일인 11월 12일 이틀전, 쾌적한 산 미구엘 만에 정박한 비즈카이노는 이곳을 산디에고라고 이름지었다. 산디에이고 축일 이틀전 산 디에이고 호를 타고 기항했다하여 산 디에이고라고 이름지었다. 까브리요가 산미구엘이라고 이름지은 이 만은 비즈까이노에 의해 산디에이고 만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1595년 12월10일 스페인 출신 세바스티안 로드리게즈 체레노 (Sebastian Rodriguez Cereno)는 몬트레이 반도 앞바다를 지나다가 마침 거대한 이 만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이 만 근해를 지나며 순교한 베드로 성인을 기려 산 베드로 만 (Bahia de San Pedro)라고 불렀다.
그는 1602년 12월10일 북상하다 거대한 반도를 돌아 항해중 거대한 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엄청 너른 이 만을 당시 뉴스페인 총독 ‘돈 가스파 디 주니가 아세베도, 5대 몬트레이 백작 (Don Gaspar de Zuniga y Acevedo, 5th Count of Montery)’을 기려 몬트레이 만이라고 지었다. 스페인 왕국은 필립핀을 통치하면서 본국 스페인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뉴스페인과 교역하는 상선의 중간 기착지를 캘리포니아 연안에 마련하려했다. 이렇게 마련된 교두보를 통해 스페인 왕실은 17세기 후반부터는 알타캘리포나에 스페인 정착지를 마련하고 선교원을 세워 원주민 전교에 열중하면서 수세기 스페인은 알타캘리포니아를 독점했다. 러나 해적 드레이크가 샌프란시스코 근방 뉴 알비용에 잠시 머문 후 스페인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모두 영국령이라는 영국측의 항의를 받았으나 까브리요의 산디에이고 상륙이 학인되면서 더 이상 영국측의 주장은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