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뚝과 나무기둥으로 울타리를 쌓다
월스트리트라는 거리는 옛 뉴암스텔담의 북부경계선이 되었다. 1640년대에는 말뚝과 사각 통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나누었다. 이 울타리를 경계로 음식물 쓰레기를 찾아 도시를 떠도는 수천마리의 돼지떼를 주거지에서 격리시키려 울타리를 세웠다. 1653년 제1차 영국과 네델란드 해전이 일어나자 서인도회사 피터 스튜이베산트 (Peter Stuyvessant)총재는 뉴잉글랜드에 주둔한 영국 해군과 원주민 민병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도랑과 말뚝으로 된 울타리를 세웠다. 울타리는 진흙에 15푸트 높이의 두꺼운 판자를 뉴암스텔담의 북쪽 경계까지 길이 2,340피트, 높이 9피트로 방책을 세웠다. 당시는 할렘 싶 운하 (Harlem Ship Canal)가 준공 전이라 영국 해군은 무리없이 맨해턴에 상륙할 수 있다고 보고 이같은 방어벽을 세웠다. 이 공사에는 아프리카에서 실려온 흑인 노예와 백인 정착민들이 동원되었다. 백인 정착민과 식민지 주둔 병사와 서인도 회사의 고용원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흑인 노예와 함께 이스트 강에서 노스 강까지 깊이 4내지 5피트 깊이, 너비 11내지 12피트의 도랑에 말뚝을 박았다. 이같은 방벽은 수시로 습격해오는 원주민과 해적 그리고 영국측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끝은 날카롭게 다듬은 통나무 목책으로 만들었다.
비버모피 거래로 거부된 유대인, 성벽건축에 거액 기부
이같은 네델란드 측 방벽공사에 23명의 유대인 정착민 중에는 모피거래로 거부가 된 5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이들은 방벽공사에 후원금 1천 플로린을 기부했다. (*플로린 (Florin)은 1252년 피렌체에서 발행한 금화로 유럽사회에서 통용되었다. 이후 네델란드와 플랑드르지방에서 발행한 플랑드르 금화는 유럽전체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1.1길더가 1플랑드르 플로린)
1664년 영국이 뉴암스텔담을 정복한 이후 영국측은 도시의 성벽을 더 늘리고 기능을 개선했다. 1673년 잠시 뉴욕을 다시 점령한 네델란드측은 전 시가지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북쪽 지역에 거대한 암석으로 호란디아 (Hollandia)라고 부르는 요새를 만들었다. 당시 해안선이었던 펄 스트리트 (Pearl Street)에 있는 하노버 스퀘어에서 시작된 이 성벽은 네델란드 인들이 히렌 제흐 (Heeren Wegh)라고 부르던 원주민이 사용하던 작은 길인 지금의 브로드웨이를 지나 오늘의 트리니티 플레이스 (Trinity Place)에서 남쪽으로 틀어 해안선을 따라 옛 요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브로드웨이 게이트가 있고 펄 스트리트에는 워터게이트가 있다. 성채와 요새는 1699년 이전되어 도시의 방패건축에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뉴욕 신청사는 1700년 월 (Wall)과 나소 (Nassau)에서 해체되는 요새의 돌덩어리를 재사용하여 건축했다. 또한 뉴욕시장은 1626년 맨해턴에 처음 소개되었다.
월 스트리트에 30여 년간 노예시장 열리다
그러나 노예시장은 1731년 12월 13일까지는 개설하지 못하고 다음해부터 장이 섰다. 뉴욕시 위원회는 월 스트리트 에 흑인과 원주민을 매매와 임대할 수 있는 시장을 개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노예시장은 1731년 12월31일까지 개설하지 못하다가 다음해부터 1762년까지 근 30여년간 월 스트리트 코너와 펄 스트리트에서 운영되었다. 노예들을 매매하는 매장의 지붕은 목재로 되었다. 초기 매장은 네 면이 개방되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판자 벽을 덧댔다. 이곳에는 대략 당일 거래할 50여 명의 노예를 수용할 수 있었다. 뉴욕 시 당국은 노예를 사고 팔 때마다 해당 거래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24명 증권거래인, 버튼우드협약 체결
월 스트리트 산기슭에서 비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던 증권거래인과 투기꾼 24명은 1792년 5월 17일 속칭 버튼우드협약 (Buttonwood Agreement)을 체결했다. 버튼우드는 북미주에서 자라는 플라타너스 나무로 이 나무 아래서 모임을 가졌다하여 이같이 부르게 되었다. 증권거래인들은 증권 특히 국채를 주로 거래했다. 이들은 증권거래의 구조를 공식화하고 거래를 위한 일련의 규칙과 지침을 마련하여 보다 조직화한 시장규제를 했다. 1794년 거래인들은 버튼우드협약으로 그들의 연합을 공식화했다.
네델란드 정착민들은 맨해턴 남단에 본국 암스텔담을 모사한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먼저 접안시설을 갖춘 항구를 건설하고 암스텔담처럼 항구와 연결된 운하를 건설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침범에 대비하여 북쪽과 서쪽에 성벽을 쌓고 남쪽 끝에는 해안 방어를 위해 해군 포대 (Battery)를 세웠다. 지금의 맨해턴 배터리 파크는 이같은 해군 포대에서 유래했다.
서인도회사는 비버모피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교역소를 설치하자 그 주변에는 많은 정착민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교역소 설치 3년후인 1628년 동인도회사에서 270명의 정착민을 이주시켰다. 새 정착민은 직접 비버를 사냥하거나 원주민들로부터 모피를 사들였다. 1624년부터 8년후인 1632년까지 뉴암스텔담의 서인도회사에서 네델란드로 실어나른 비버모피는 개설당시 1,500장에서 1632년에는 무려 1만 5천장으로 금액은 14만 3천길드에 달했다.
흑색 구슬 한 묶음으로 비버모피 5매 구입
원주민으로부터 비버모피를 구입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서인도회사 측은 우선 본국에서 모직 옷감을 맨해턴에 들여와 맨해턴의 원주민과 원주민들의 화페인 조가비구슬로 거래했다. 서인도 회사 측은 조가비 구슬을 가지고 허드슨 강을 통해 포트 오렌지 지역의 원주민과 비버모피를 교환했다. 1624년 청색과 회색 모직 200매를 교환한 조가비 구슬로 비버모를 무려 1만장을 교환할 수 있었다. 정착민도 세월따라 급속히 늘어났다. 처음 교역소 설치 때 고작 270명이던 정착민은 1655년에는 무려 2천명에서 3천5백여명, 그리고 1664년 영국에 항복할 무렵에는 6,0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물품거래내역에 따르면 거래에는 각기 다른 언어 18개가 쓰였다..
맨해턴의 레나페 부족들은 비버모피거래 대금을 철제단도나 도끼 그리고 낚시바늘이나 냄비, 주전자 심지어 화승총이나 위스키, 럼주로 거래했다. 그리고 부족들의 화폐인 조가비 구슬도 주요 거래수단이었다. 이들이 사용한 조가비는 동부지역 하천이나 호수에 자라던 조가비 조개로 뉴저지,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다듬었다. 이들은 조개껍질을 여러 조각으로 깨어버리고 조각들을 손으로 비벼 매끈한 윤을 냈다. 특히 검은색이 나는 조개 조가비가 값이 더했다. 레나페 부족들은 이같이 윤이나고 색깔이 고은 구슬을 추장의 장식품이나 신부의 결혼예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 구슬을 특정모양의 끈으로 엮어 의사를 소통하고 또 기록을 남기는데 사용했다. 이처럼 끈으로 엮은 구슬을 왐품 (Wampum)이라고 했다. 360알을 꿰어만든 것을 1왐품이라고 했다. 특정 색깔과 재질을 연결한 왐품은 의미를 전달했다. 이같은 조가비 구슬은 북미 대륙에서 독립전쟁 때까지 스페인 은화 등 여러종류의 주화와 함께 유통되었다. 특히 비버모피 교역에는 주요통화가 되었다. 즉 흑색 구슬 왐품 하나로 비버모피 5장을 살 수 있었다. 1626년에는 흑색 왐품 하나는 백색 왐품 2개, 10길더는 비버모피 5장의 가치를 지녔다. 이처럼 비버모피를 네델란드 등 유럽인에게 판 원주민들은 대신 총과 화약을 사들여 비버 사냥에 열을 올리자 자연 북미 대륙의 원주민과 탐욕스런 유럽의 사냥꾼들은 더 너른 사냥터를 찾아나섰다. (*비버모피와 조가비구슬 이야기는 전 세종대학교 홍석희교수의 ‘유대인, 대구잡이와 비버모피 수출에 가담하다’를 참고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