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북미주 지형을 바꾼 염장대구와 비버모피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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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무역 제패하려 영.네 양국간 근 140년 전쟁 
신천지 북미대륙에서 영국과 네델란드는 사이가 좋았다. 한때 영국의 청교도들은 가까운 네델란드로 몸을 피했다. 종교의 자유를 찾는 영국의 청교도들을 따라 네델란드의 종교자유 신봉자나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추방되어 네델란드에 정착한 유대인도 청교도들 틈에 끼어 신천지로 향했다. 원주민간에 비버모피 사냥터를 두고 살육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과 네델란드는 한편이 되어 프랑스가 지원하는 원주민 알곤퀸 부족에 맞섰다. 그러나 양국간의 우호는 네델란드가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금이 갔다. 드디어 네델란드 함선이 영국 테임스 강 어귀를 점령하는가 하면 양국간에는 근 140여 년에 걸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었다. 이같은 전쟁은 영국해군이 1664년 뉴네델란드의 본거지이며 월 스트리트가 있는 뉴암스텔담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속칭 영란전쟁이라고 부르는 영국과 네델란드 간 대규모 전면전은 모두 4차례. 1652-1654년 일어난 첫번째 전투는 청교도 전쟁으로 실추된 영국의 해운과 무역을 회복하고자 호국경이라 불리우던 올리버 크롬웰이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면서 벌어졌다. 당시 영국의 함대는 동인도 제도에서 아시아의 특산품을 싣고 귀국하는 네델란드 함대를 영국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하면서 시작됐다.

1664년 뉴암스텔담 정복 후 뉴욕으로 개명
당시 네델란드 조선능력은 세계 최고였다. 네델란드는 규모가 큰 함선을 건조하여 수출하지만 자신들은 보유하지 않았다. 영국은 대형 함선과 횡으로 적선을 상대하는 단종진 전법으로 영국의 로버트 블레이크는 1652년과 1653년 굿윈샌즈 해전과 폴리머스 해전, 켄티쉬 해전에서 네델란드의 마르턴 트롬프 제독이 이끄는 함선을 연이어 격파하고 승리했다. 이어 몇차례 전투와 헤이그 근해 스헤베닝 해전에서 네델란드의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자 네델란드 해군은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잃고 스코틀랜드를 우회하여 본국으로 귀국했다.
1665년부터 1667년까지 3년간 양국간의 제2차 충돌이 일어났다. 이 기간동안 영국은 왕정복고 후 집권한 찰스 2세는 항해조례를 갱신했다. 그리고 1664년에는 뉴욕만의 맨해턴 섬에 자리잡은 뉴암스텔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개명했다. 이같은 여세를 몰아 영국은 1655년 3월 네델란드에 선전포고하여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프랑스의 참전으로 패했다. 그러나 1665년 영국에 흑사병의 만연과 1666년 런던시내의 대화재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1667년 6월 네델란드의 미힐 더 라위테르 제독이 침입한 후 테임스 강하구를 봉쇄했다. 제3차 전쟁은 1672년부터 1674년까지 계속됐다. 제4차 전쟁은 1780년12월 20일 영국이 일방적으로 네델란드에 선전포고하면서 일어났다. 영국은 1781년 네델란드 해안을 봉쇄하고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1781년 8월 네델란드는 도거뱅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추가적으로 이를 지킬 함대를 조직하지못하고 1784년 5월 영국 측에 항복했다. 네델란드는 대형함선 보유를 두고 대형함선을 무조건 수출하자는 측과 국내에도 보유하자는 측이 맞서는 정쟁으로 무장 기회를 잃어 영국에 패했다. 이후 영국은 해양강국으로 부상하고 강대국 지위를 잃은 네델란드는 사양길에 들어섰다. 

대포 한방 쏘지않고 뉴암스텔담 무혈입성
1660년 호국경이라 불리우던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영국은 왕정을 복구하고 크롬웰에 의해 처형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즉위했다. 프랑스에서 망명생활하던 찰스 2세는 네델란드와 해양강국 독점을 위해 크고작은 해전을 벌였다. 찰스 2세는 대외정책에서 함께 망명생활을 한 동생 제임스와 알링톤 백작 1세인 헨리 바네트 (Henry Bannet: 1618-1685.7.28)의 조언을 많이받았다. 바네트는 1662년부터 1674년까지 근 12년간 찰스왕 아래서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대외정책을 자문했다. 이 무렵 로드아일랜드에는 제임스 스콧 (James Scott)대위가 병력이 빈약한 로드이일랜드의 네델란드 정착촌을 유린했다. 1664년 찰스 2세는 요크 공작 (Duke of York)인 동생 제임스 (1633.10.24- 1701.9.16. 찰스 2세 사망으로 승계하여 제임스 2세가 됨)에게 로드아일랜드에서 활동중인 존 스컷 (John Scott)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편 요크 공작의 명을 받은 리차드 니컬 함장은 함선 4척에 450명의 완전무장한 수병을 이끌고 1664년 5월 24일 영국 남부에 있는 포츠머스 (Portsmouth)항을 출항하여 그해 8월27일 롱아일랜드의 그래브센드 (Gravesend)만에 도착했다.
뉴암스텔담 시민들 저항을 포기
그리고 서쪽방향에 위치한 블류크렌 (Breukelen)으로 이동하여 이곳 민병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함장 니콜 대령은 맨해턴의 요새 암스텔담에 도착하여 뉴  네델란드 총독이며 서인도 회사의 총재인 피터 스투이베산트 (Peter Stuyvessant)장군에게 순순히 항복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듀크 공작은 자신이 다스릴 정착지가 파손되는 것을 원하지않아 대포 한방 쏘지않고 항복을 받을 심산이었다. 뉴암스텔담의 요새에는 당시 화력조차 넉넉하지 않았다. 영국의 함선이 롱아일랜드에 기항했을 무렵 스투이베산트 총독은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성벽쌓기 등 공사에 강제동원된 정착민은 총독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9월 4일 맨해턴 인근 해안까지 다가온 영국 함선들은 뉴암스텔담 요새 가까이 몰려와 기동연습을 했다. 뉴암스텔담 거주 시민과 유력상인을 포함한 93명 시민과 심지어 총독의 아들까지 저항을 주저하자 마침내 스투이베산트 총독은 백기를 들었다.
뉴암스텔담의 몇몇 유력상인들은 인근 스투이벤산트 농장에서 항복문서 초안을 가지고 니컬함장 측 인사를 함상에서 만났다. 네델란드 측 상인과 정착민들은 영국 측으로부터 사유재산에 대한 정당한 권리와 상속권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이같은 문서는 1664년 9월 6일 총독의 법률 대리인 요하네스 다 데커(Johannes da Decker)를  포함한 6명의 인사가 서명하면서 성사됐다. 그리고 2일 후 뉴암스텔담은 요크 공작을 기려 새로운 요크라는 ‘뉴욕-즉  ‘New York’으로 개명했다. 뉴네델란드가 항복문서에 서명한 6일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월요일인 9월 8일 뉴네델란드의 병사들은 비버 스트릿 (Beaver Street)까지 행군한 후 네델란드로 철수하기위해 정박중인 기데온 (Gideon)함선에 올랐다. 그리고 1664년 9월 8일부터 뉴암스텔담은 요크 공작의 이름에 연유해서 새로운 요크 즉 뉴욕으로 불렸다.
니컬스 함장은 부총독이 되었다. 그리고 9년이 흘렀다. 영국과 네델란드는 1673년 제3차 전쟁을 벌였다. 코어네리스 에버스틋센과 제이컵 빙케스가 이끄는 연합함선단은 뉴네델란드를 탈환하면서 근1년간 뉴욕시를 점령한 후 총독 안토니 콜브 (Anthony Colve)총독이 다스렸으나 1674년 웨스트 민스터 조약 체결시 남미의 수리남 (Suriname)과 뉴욕을 맞교환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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