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비버모피는 원주민을 파멸시켰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주자’들
프랑스의 총리인 리셀유 (Richelieu)추기경은 1627년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의 모피거래상 1백여명을 회원으로 하는 뉴프랑스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회원에 한해 모피무역전매권을 주었다. 이로써 뉴프랑스에는 매년 2백내지 300여명의 정착민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모피전매특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요하여 독점 신탁회사의 회원들은 일정 금액을 정부에 헌납했다. 이처럼 모피사냥과 거래를 정부가 강력 규제하자 회원이 아닌 일부 사냥꾼의 비행도 늘었다. 일명 ‘숲속의 질주자 (Runners of the Woods, 불어로는 Coureur des Bois)’가 등장했다. 숲속의 질주자들은 나무가 울창한 비교적 외지의 원주민과 어울려 생활하며 밀렵과 불법거래로 생활했다. 자연 이들사이에는 혼혈아가 태어나고 혼혈아는 자라면서 사냥꾼이 되었다. 이처럼 뉴프랑스를 중심으로 프랑스와 원주민사이 상품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너른 벌판과 우거진 삼림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순박한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은 근본부터 흔들렸다. 이들은 더 이상 돌을 갈아 화살촉이나 도끼날, 돌을 매단 몽둥이를 만들려하지 않았다. 화살촉 대신 총알을, 그리고 날이 시퍼런 철제 도끼나 칼, 창을 원했다. 그리고 흙으로 비진 항아리대신 주전자를 원했다. 이처럼 편리하고 효능이 뛰어난 유럽산 제품은 그들이 선호하는 비버모피만 가져가면 무한정 구할수 있었다.
비버모피가 바꾼 원주민 전통 생활방식
그리고 온몸에 경련이 일고 생기를 주는 생명수인 럼 주나 위스키도 언제고 구할 수 있었다. 이같은 유럽의 신문물을 구하기 위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바라보며 들판을 달리며 자연과 생활하던 원주민들은 비버모피 등 동물의 가죽을 구하기위해 너도나도 사냥터를 찾았다. 유럽의 정착민들도 땅을 파고 씨앗을 심어 작물을 구하는 것보다 원주민들의 안내를 받으며 부드러운 황금색 노다지 비버잡이에 나섰다. 탐욕의 화신 유럽인들은 더 많은 비버모피를 확보하기위해 원주민들에게 총을 나누어준 후 사냥터를 함께 누볐다. 세월이 가면서 자연 프랑스 정착민들이 모여사는 세인트 로렌스 강 주위의 비버는 개체수가 줄었다. 탐욕스런 유럽의 비버 사냥꾼은 원주민과 더불어 더 많은 비버를 찾아 내지로 들어가면서 그 지역에 터를 잡고사는 기존 원주민과 충돌이 일었다. 또한 원주민들도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유럽인의 앞잡이가 되어 즐겨 유럽인을 위해 더많은 비버잡이로 헌신했다.
영국인들, 뉴프랑스에 정착촌 설치
뒤늦게 신대륙에 뛰어든 영국도 원주민과의 상품교역에 관심을 갖게되어 교역할 수있는 원주민과 그들의 연고지가 필요했다. 데이비드 커어크 (David Kirke)의 아버지는 몇몇 런던의 상인들을 규합하여 1627년 캐나다의 세인트 로렌스 일대에서 비버모피 등 원주민과 교역할 모험가 상인 회사를 세웠다. 신세계에 정착촌을 세우고 탐험을 통해 영국의 국위를 만방에 떨치겠다고 설립된 이 회사는 왕실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마침 그 해 말경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일자 캐나다의 모험가 상인회사는 캐나다에 진출하여 아카디아 (*Acadia: 북아메리카의 북동쪽에 위치한 뉴프랑스의 정착지. 메인의 케네벡 강과 가스페 (Gaspe)반도, 마리타임 일대를 칭함.)에 윌리암 알렉산더 경의 이름으로 정착촌을 세우려 했다. 이들은 개인 비용으로 함선을 만든 후 화력을 장착한 사략선 3척을 출항시켰다. 3척의 배에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이주 회망자들을 태웠다. 데이비드 커어크의 3형제인 루이스 (Lewis), 토마스 (Tomas), 자아비스 (Jarvis)도 승선했다. 3척의 배는 ‘차알스 포트계획’에 따라 우선 항구를 세우기로 했다. 영국을 출항한 3척의 사략선은 뉴펀드랜드 동쪽 해안에 있는 조오지 칼버트의 페리랜드 (Ferryland)에 기항하려했으나 이후 계획을 수정한 후 포오트 로얄 (Port Royal)에 기항한 후 이곳을 탐험대의 기지로 사용하기로 했다. 병사들은 세인트 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퀴벡에서 160킬로 거리의 타두삭(Tadousac)을 힘들이지 않고 점령한 후 정착촌을 유린했다.
퀴벡을 봉쇄한 후 항복을 권유
세인트 로렌스 강 어귀를 점령한 커어크는 세인트 로렌스 강의 출입을 봉쇄한 후 프랑스의 보급선은 일체 퀴벡 정착촌에 이르지 못하게 봉쇄를 강화했다. 이어 커어크는 뉴펀드랜드 일대에서 대구잡이를 주업으로 하는 바스크 (Basque)부족 어부 몇명을 뉴프랑스 총독 샹프렝 (Samuel de Champlain)이 머무는 퀴벡에 보내 보급선을 나포하고 로렌스 강을 봉쇄했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샹프렝은 조국은 뉴프랑스의 정착민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항복을 거부했다. 이에 맞서 커어크는 퀴벡 정착촌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로렌스 강 봉쇄로 몇달동안 보급선 뱃길이 끊기자 퀴벡 정착촌의 정착민들은 양식이 바닥 나 아사직전에 이르렀다. 이처럼 양측간의 긴장이 고조된 사이 겨울이 다가왔다. 커어크는 본국에서 겨울 작전을 협의한 후 로렌스 강으로 귀대중 프랑스 브리송 (Claude Rooquemont de Brison) 제독이 이끄는 4척의 보급선과 조우했다. 이 후 양측은 한바탕 포격전 끝에 커어크 형제는 프랑스 측의 보급선 4척을 모두 나포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