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사막의 아이 'SF만'을 향해 말을 달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어린 디 안자를 돌보는 당숙 펠립페
어린 디 안자는 사망한 아버지 디 안자의 사촌 페드로 펠립페 (Pedro Felipe)의 보살핌을 받게 됐다. 페드로 펠립페는 고향 바스크 지역의 헤르나니 (Hernani)를 떠나 소노라의 프론테라스 근방으로 이주하여 디 안자의 보살핌으로 자리를 잡게되었다. 어린 디 안자는 성장하면서 그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되었다. 그는 뒤늦게 신천지 소노라를 찾자 우선 디 안자가 근무하던 치와와의 야노스 수비대에 근무하는 디 안자를 찾았다. 그는 디 안자의 배려로 이곳 바스크 지역 출신들과 끈끈한 인맥을 통해 단기간에 자리를 굳혔다. 그는 특히 은광개발로 일확천금을 마련한 거부 마뉴엘 디 알다코 (Manuel de Aldaco)와 호세 디 보르다 (Jose de la Borda)와 친교를 가졌다. 돈 페드로는 이들의 도움으로 탁스코 (Taxco)의 광산개발로 거금을 마련했다. 이같은 재력을 바탕으로 돈 페드로는 자연 이 지역 바스크 부족 상류층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디 안자가 영세를 받을 때 대부가 되었다. 돈 페드로 펠립페는 디 안자 사령관 사후에도 꾸준히 어린 대자 디 안자의 후견인이 되어 지켜주었다. 디 안자가 자라면서 페드로 펠립페는 유력 바스크 상류층 인사들과 면을 트게 도와주었다. 디 안자가 야노스 수비대에 근무할 때부터 이웃해 살았던 돈 페드로는 디 안자가 프론테라스 사령관으로 전임하자 그를 따라 프론테라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디 안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곤경에 처한 마리아 로사를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인근 바스크 정착민들도 조직적으로 마리아 로사의 유가족을 지원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1774년과 1776년 디안자 2세의 캘리포니아 탐험때도 이 조직을 통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1740~1755사이 디 안자의 인격이 형성되다
디 안자는 어머니 마리아 로사와 아버지의 사촌인 대부 돈 페드로의 보살핌을 받으며 우아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서서히 아버지가 이룩한 깊은 그늘을 실감하면서 생전 아버지의 진정한 실체를 깨달았다. 소노라 일대의 정착민들은 평소 자애스럽고 사나운 아파치들의 공격으로부터 헌신적으로 방어해주던 사령관 디 안자를 진심으로 공경했다.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서거를 깊이 애도했다. 특히 1736년 아리조나 목장 주변에서 은괴소동이 났을 때 정착민들을 위한 그의 혼신의 노력에 감사했다. 디 안자는 일반 서민의 입장에서 공정하게 은괴의 진정한 소유주인가 판별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같은 디 안자의 노력으로 우연하게 발견된 은괴는 모두 발견한 서민들의 몫이 되었다. 소노라 일대의 정착민과 주민들은 디 안자의 이같은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디 안자 사령관은 정착민과 원주민, 그리고 선교원을 무도한 아파치들의 약탈로부터 보호했다. 이같은 디 안자 사령관의 노력으로 예수회도 소노라 일대에 많은 선교원을 세우고 선교원 사제들의 전교지역을 넓힐 수 있게 했다.
정착민 보호에 진심을 보인 디 안자
예수회 소속 카를로스 로하스 (Carlos Roxas) 신부도 어린 디 안자가 자라는 동안 그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소노라 태생인 로하스 신부는 1727년부터 소노라의 아리즈페 (Arizpe) 인근에서 전교활동을 폈다. 로하스 신부는 예수회 사제가 전원 뉴스페인에서 추방될 때까지 활동했다. 로하스 신부는 1736년 3월 갓 태어난 디 안자에게 첫 영세를 베풀고 25살이 된 디안자가 1761년 결혼할 때는 혼배성사도 베풀었다. 로하스 신부는 아버지를 일찍 여윈 어린 디 안자의 빈 마음을 곁에서 지켜주고 자라는 디 안자의 인격형성에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다. 디 안자의 한창 성장기인 1740년부터 1755년까지 근 15년간 그의 인격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로하스 신부는 또한 요새 안에 있던 사령관 관사를 떠나 바소추카 마을로 이사한 마리아 로사와 어린 자녀들을 물심양면으로 보살폈다. 이곳은 또한 로하스 신부의 사역구역이기도 했다. 로하스 신부는 자연 어린 디 안자의 장래를 좌우할 교육문제도 마리아 로사와 진지하게 고민했다. 로하스 신부와 디 안자의 손위 매형인 디 빌도솔라 (Gabriel Antonio de Vildosola)도 로하스 신부와 함께 디 안자의 미래를 고민하고 어린 디 안자를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따르게했다.
16세때 프론테라스 수비대 사관후보가 되다
1752년 16세가 된 디 안자2세는 매형 빌도솔라와 로하스 신부 그리고 돈 페드로 펠립페의 조언과 격려를 받으며 매형인 빌도로사가 수비대장인 프론테라스의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했다. 디 안자에게는 급여도 없고 하다못해 장비와 피복, 화기도 자비로 해결했다. 디 안자는 드디어 가죽 갑옷을 입고 가볍게 말에 오르던 병사들처럼 어린시절 딩굴던 연병장을 누비게되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며 디 안자는 목숨을 건 전쟁이라는 실체를 관목이 우거진 평원을 말을 달리며 병사들과 함께 익혔다. 디 안자는 말을 타고 피메리아 알타의 깎아지른듯한 바위투성이 시에라 마드레 옥시덴탈을 말을 타고 오르기도했다.
“당시 최변방 요새의 병사들은 스페인 정규군 병사들과는 많이 달랐다. 이들은 대부분 정착지의 민병대나 경우에 따라 징용된 민간 병사와는 완연히 구별되었다. 수비대의 병사들은 정규군이 군기나 검열에 민감한데 비해 요새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칭찬에 사기가 오르곤했다. 이들은 뛰어난 병사는 아닐지라도 황야나 사막, 또는 너른 평원에서 벌레나 모기에게 물리면서 말을 달리며 교활한 인디안에 쉽게 대응해 목숨을 부지할 줄 아는 진정한 황야의 병사들이었다”.
사관 후보생으로 프론테라스 수비대의 연병장을 밟은 디 안자는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입대한지 만 3년 만인 19세때인 1755년 7월1일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간 디 안자는 무보수 사관으로 모든 보급품은 자비로 부담했으나 이제 정식 급여를 받는 황제의 군이이 되었다. 그리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소노라 일대에서 원주민들의 저항을 진압하며 하루를 보냈다. 사막의 어린아이는 이처럼 당당한 군인이 되어 일생 스페인 황실을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디 안자는 인근의 피마부족과 야퀴이 부족의 저항이 있는 곳이면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가 진압하고 아파치들의 약탈로부터 정착민을 보호하여 용감한 군인으로 칭송을 얻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