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사막의 아이 ‘SF만’을 향해 말을 달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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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전투능력으로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
디 안자 사령관은 또한 수비대내의 병사들에게 영적 축복을 주고 진정으로 종교생할을 할 수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그의 부친 디 안자 1세 사령관은 예수회 사제들이 선교원을 세울 때 적극 협조했다. 그리고 예수회의 나이든 어거스틴 디 캄포스 (de Campos) 신부가 멀리 떨어진 새로운 임지로 떠날 때는 자택으로 모셔와 도움을 주기도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듣고 자란 디 안자는 수비대 병사들을 위해 부인 세라노의 오빠가 투박 지역 사제로 체류하는 동안 수비대 병사들의 영적인 만족을 취하도록 편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병사들도 봉급의 11조를 하느님께 바치도록 했다. 또한 디 안자는 사재를 헌납하여 선교원을 건설하는 데 일조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또한 1767년 뉴스페인 일대에서 예수회 선교원 소속 사제들을 전원추방할 때 황실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스페인 황제 카를로스 3세는 1767년 7월 23일 소노라 일대의 예수회 선교원 소속 사제들을 전원 베라 크루즈까지 호송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황제의 칙령은 소노라 지사 디 피네다 (Juan Claudia de Pineda) 에게 비밀리에 내렸다. 이같은 칙령에따라 디 안자 사령관은 평소 가깝게 모셨던 예수회 사제들을 일정한 장소에 구금해야 했다. 그에게  영세를 베풀고 혼배성사까지  베풀어 준  카를로스 로하스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디 안자가 로하스 신부에게 베풀 수 있는 호의라고는 고작 로하스 신부에게  자주 선교원을 옮겨다니며 구금 날짜를 연기해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로하스 신부도 소노라 남쪽에 위치한 마타페 (Matape)의 수용소까지 강제 이송되었다. 예수회 신부의 강제추방으로 많은 사제들이 베라크루즈까지 이송되는 도중 목숨을 잃었다. 디 안자는 소기의 명령을 차분히 수행하고 1767년 9월 1일 투박수비대로 복귀했다.

디 안자를 높이 평가한 보고서 황제에 제출 
그간 디 안자가 이룬 무용과 평소 생활에서 보여준 미덕, 그리고 그의 업무처리 능력은 자연 황실에서 파견나온 비밀감사관에게 전해졌다. 돌아간 감사관은 투박수비대 사령관 디 안자가 얼마나 충성심이 깊고 또한 적에게는 얼마나 위협적인 사령관이며 정착민들에게 얼마나 자애롭고 사랑을 받는가를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러한 평가는 이후 디 안자가 알타캘리포니아 연안 탐험에 지휘자로 선발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타캘리포니아 개척에 열심인 신임지사
생전 디 안자 사령관은 선교원의 사제들이 활동할 수있는 선교지역 확장에도 힘썼다. 이처럼 선교지역을 확장하려면 선교원이 들어서고 선교원을 중심으로 생겨난 정착촌의 정착민을 위해 보급품이 원활하게 공급되어야 했다. 그러나 해상을 통한 보급선은 서태평양 연안의 거친 바닷바람과 파도때문에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부득이 육상을 통한 보급은 아파치들의 발호로 좀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서부연안에는 요새를 세울 수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곳이 많았다. 이같은 사실에 주목한 디 안자는 생전 알타캘리포니아로는 육상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과 뜻을 같이하던 황제의 특사 갈베즈가 대영제국과 힘을 겨루는 인도로 전출되었다. 디 안자는 이러한 자신의 뜻과 탐험계획을 총독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전 디 안자 사령관은 탐험대의 보급품 수송로를 사전 답사하던 중 아파치에 의해 피살되었다. 디 안자가 사망하고 근 30년의 세월이 구름처럼 흘렀다.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육상의 길은 그후 모험가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갈베즈 특사의 후임으로 1771년 부임한 안토니오 디 부카렐 (Antonio de Bucarell)은 꺼져가던 알타캘리포니아의 육상의 길 개척과 정착에 횃불을 높이 들었다. 부카렐 지사는 부임직후 알타캘리포니아의 선교원과 수비대가 얼마나 취약한 곳에 있는 가를 실감했다. 마침 대영제국을 비롯한 러시아 제국도 비버모피 사냥을 위해 캘리포니아를 넘보고 있었다. 신임 소노라 지사 디 부카렐은 스페인 황제의 영토 알타캘리포니아를 노리는 누구도 용서할 수없다고 확언했다.

디 안자, 대원 40명 지휘하여 제1차 탐험 
예수회 신부들을 대신하여 프란시스칸 사제들이 멕시코 소노란 지역과 아리조나 국경지대 선교원을 책임졌다. 마침  프란시스코 사제 가르세스 (Francisco Garces: 1781 4.12-1781.7.18)가  소노란지역 사제로 부임했다. 그는 일찌기 캘리포니아 일대의 황량한 사막지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탐험한 지역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작성하여 신임 총독에게 제출했다. 이를  검토한 부카렐 지사는 투박수비대장 디 안자가 제안한 캘리포니아로 가는 육상의 길 개척은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이를 승인했다. 사망한 디 안자 1세의 탐험계획안을  기억하는 뉴스페인의 관료들은 그의 아들 디 안자 2세가 제출한 내용은 비슷하다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후 디 안자가 알타캘리포니아 탐험을  시작하자 그의 대부 페드로는 멕시코시티의 바스크 부족으로부터 탐험에 필요한 경비를  모금하고 디 안자 2세를 후원했다.  
투박사령관 디 안자 2세의 알타캘리포니아 1차 탐험은 1774년 1월 9일 투박수비대를 출발했다. 디 안자는 수비대원의 근 절반인 34명의 병사와 시종, 그리고 양식을 나르는 나귀를 모는 나귀몰이꾼과 젖소 등 가축을 모는 몰이꾼과 안내를 맡은 프란시스코 가르세 신부 등 모두 40명의 대원은 근 500여 마일이 넘는 로스안젤레스인 산 가브리엘 선교원을 향해 출발했다. 사령관 디 안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투박요새는 후앙 마리아 올리바 (Juan Maria Oliva)중위가 지휘했다. 벨데레인 사령관 때 투박요새의 수비병으로 복무를 시작한 그는 근 40 여년을  투박수비대를 지킨 역전의 용사였다. 디 안자는 전 대원을 10개의 작은 분대로 나누었다. 일행은 1월 9일 일요일 아침, 미사를 마치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투박의 1월은 하얀 입김이 내쉴 정도로 차가웠다. 멀리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밀가루와 콩 등 양식과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화기, 연장, 담배와 원주민에게 선물할 유리구슬 등을 실은 나귀가 뒤따랐다.

10주만에 500마일 거리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도착
그리고 여행중 필요한 우유를 공급할 65마리의 젖소와 도축할 소와 갈아 탈 말 140 마리 말을 모는 몰이꾼들의 고함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그리고 일행은 알타에서 북서쪽을 향해 전진한 후 얼마 후 소노라의 황량한 사막을 지나 물과 초원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막을 지났다. 그리고 힐라 강을 지나 콜로라도 강에 이르자 마중나온 유마 인디안 추장 살바도르 팔마 (Salvador Palma)에게 스페인 황제의 이름으로 된 훈장을 수여했다. 콜로라도 강을 건널 때 일행 중 수영을 못하는 가르세 신부와 말을 타고 강을 건너기 두려워하는 대원을 팔마 추장과 유마 인디안들이 건너 주었다. 일행은 모래 둔덕이 늘어선 사막을 끼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레고 계곡을 지나 습지대에 이르자 근방에서 야영했다. 디 안자는 안내인 세바스티안 타르발의 노고를 치하해 이곳을 산 세바스티안이라고 불렀다. 일행은 하루 평균 7내지 8마일을 행진한 후 10주일만인 1774년 3월 22 일 오늘의 로스안젤레스 부근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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