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열린 후 바람같은 무한의 세월이 흘렀다. 캘리포니아 연안을 스치던 바닷물은 거대한 빗장같은 짙은 바다안개에 가려져 수줍은 듯 외부에 그 천연의 모습을 보이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또 무한의 세월이 흐르면서 미지의 땅 북미대륙의 아즈텍 (Aztec) 제국은 중세 유럽의 최강자 스페인제국의 탐험가 코르테즈 (Cortez)에 의해 1522년 정복되었다. 아즈텍 제국이 힘없이 무너지면서 외지인의 출입을 막았던 거대한 빗장은 서서히 무너졌다. 컬럼부스가 유럽인 최초로 중남미에 둥지를 친 지 고작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해양 탐험가들처럼 코르테즈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여 아시아 대륙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전설속의 아니안 (Anian) 해협을 찾아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 아카폴코 (Acapulco) 항구에 탐험에 동원될 선박을 집결시켰다. 거친 바다를 누비며 신천지를 찾던 탐험가들과 항해사들은 손쉽고 빠르게 향신료와 황금의 땅 동방에 이르는 아니안 해협을 찾으려 목숨을 건 모험을 했다. 그러나 코르테즈는 직속 상관인 하바나 총독의 명령을 거스르고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원죄로 그의 아니안 해협 탐험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게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532년 코르테즈는 태평양을 낀 캘리포니아 북미 연안대신 멕시코 연안에 몇 척의 선박을 보내 오늘의 캘리포니아 연안을 탐험했다. 이중 1척의 탐험선이 오늘의 바하캘리포니아 (Baja California)에 기항했다. 코르테즈는 유럽인 최초로 오늘의 ‘라파즈 (La Paz)’에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양식 등 보급품 조달이 용이하지 않아 1년만에 포기했다.
짙은 안개로 실체를 드러내지않던 골든게이트
1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당시 해양 강국 포루투갈과 스페인, 영국의 항해사들은 태평양 연안에 안전한 항구를 마련하려 캘리포니아 연안을 찾았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을 지나는 항해사들은 오늘의 샌프란시스코 만 (Golden Gate)입구를 가리는 짙은 바다안개와 풍랑으로 거대한 만의 실체를 보지못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의 입구 골든 게이트는 이처럼 거친 풍랑과 짙은 바다안개에 몸을 가린 채 무한의 세월을 버텼다.
실제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에 유럽인의 정착촌이 형성되기까지는 1769년 알타캘리포니아의 초대총독 겸 군사령관 포톨라 (Gaspar de Portola)가 처음으로 육안으로 이름도 없던 거대한 샌프란시스코 만을 확인하고도 1세기가 지난 후였다. 샌프란시스코 만은 이처럼 바다의 사나이 항해사가 아닌 육상 탐험대에 의해 양식이 떨어져 사슴사냥하던 병사들에 의해 사고처럼 우연히 발견되었다.
탐험가 까브리요 바다안개로 골든 게이트 지나치다
16세기 중반 유럽대륙의 최강자 스페인 제국은 중남미 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한손에는 성경, 다른 한손에는 날이 시퍼런 긴 칼을 든 스페인 정복자들은 낯선 땅에 숨겨져있는 무한정한 자원을 약탈하는 대신 원주민들을 하느님 곁으로 인도했다. 원주민들은 하느님에 의해 자신들의 영혼을 구하는 대신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을 잃었다.
1530년 경부터 스페인 제국은 그들의 통치권을 오늘의 멕시코 지역에서 북쪽 으로, 그리고 1540년경부터는 리오 그란데 (Rio Grande) 이북 지역까지 탐냈다. 1542년 까브리요 (Juan Rodriguez Cabillo)는 뉴스페인 총독의 명을 받고 뉴스페인 북서쪽 캘리포니아 연안 탐사에 나섰다. 1542년 9월 28일 까브리요는 폭풍우를 피해 오늘의 산디에이고라는 안전한 만에 배를 정박한 후 이곳을 산미구엘 (San Miguel)이라고 이름 지었다. 까브리요는 유럽인 최초로 캘리포니아 연안을 따라 항해한 유럽인이 되었다. 산 미구엘은 이후 로드리게즈 비즈까이노에 의해 산디에이고로 개명됐다. 당시 까브리요는 캘리포니아 연안을 따라 오늘날 러시안 리버가 있는 마린 카운티까지 항해했으나 폭풍우에 따른 선박의 난파가 두려워 오늘의 골든게이트 근방 포인트 레이스 (Piont Reyes)에서 뱃길을 돌렸다. 그리고 까브리요와 그의 선원들은 짙은 바다안개로 샌프란시스코 만 입구를 지나면서 내륙까지 뻗은 거대한 만을 볼 수 없었다.
캘리포니아 연안에 항구를 찾는 마닐라 상선단
스페인 제국이 1565년 동남아의 섬나라 필립핀을 정복한 후 캘리포니아 연안에 안전한 항구를 세우려는 스페인 제국의 탐험은 계속되었다. 1566년 마닐라 갈레온 (Manila Galleon)이라고 불리우던 스페인 상선단은 부지런히 뉴스페인과 마닐라를 오가며 교역했다. 필리핀과 멕시코를 오가는 상선단은 항해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너른 북 태평양을 가로지르려면 몇차례 거친 파도를 지나야했다. 오랜 항해로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고생했다. 마닐라를 떠난 상선단은 긴 항해끝에 캘리포니아의 연안에 항구를 마련하고 손상된 선박도 손보고 부족한 보급품도 조달해야했다.
영국의 해적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멕시코의 서쪽 해안과 캘리포니아의 연안에 몇몇 항구를 마련한 후 안전한 항구를 찾는 상선단에게 돈을 받고 정박을 허가할 정도였다. 영국의 유명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그같은 해적중 하나였다.
유럽인 최초로 골든게이트에 정박한 해적 드레이크
1579년 6월 17일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해적선 ‘황금색 암사슴’호는 캘리포니아 연안을 따라 항해하다 폭풍으로 많은 손상을 입었다. 드레이크는 마침 안개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오늘의 샌프란시스코 만 입구를 보았다. 드레이크는 폭풍우와 강한 파도에 손상된 선체를 수리하려 포인트 레이스 (Point Reyes : *포인트 레이스는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에서 북으로 30마일거리의 서쪽 연안에 위치) 남동쪽의 후미진 조그마한 만에 정박했다. 이곳은 이후 드레이크 만 (Drake’s Bay)으로 불렸다. 낯선 괴물체를 보고 인근 원주민 미워크 (Miwok)족들이 몰려들었다. 다행스럽게 원주민들은 낯선 외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드레이크의 해적 80여명은 23일간 머물며 황금색 암사슴 호를 손보는 동안 미워크 족들은 선체를 수리하는 선원들에게 친절하게 손을 빌려주었다. 이들은 식수와 사냥한 사슴고기 등 양식도 제공했다. 드레이크 일당은 오늘의 골든게이트에서 북으로 30마일거리의 뉴알비용 (New Albion)인근 포인트 레이에스에 23일간 머문 후 7월 10일 떠났다. 떠나기 전 드레이크의 해적들은 “스페인 통치권이 미치지않은 곳은 모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영토”라고 새긴 동판을 남겼다. 이후 드레이크의 이같은 주장은 이곳의 영토권을 둘러싸고 국제 사회에 많은 논란을 불렀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