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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사슴 사냥하다 대원이 발견한 '샌프란시스코' 만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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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바다안개에 가려진 골든 게이트
1542년 까브리요도 포인트 레이스 연안을 지났으나 짙은 안개로 샌프란시스코 만 입구는 보지 못했다. 난파가 두려워 연안 해변을 가까이 스쳐 지나간 드레이크도 짙은 바다안개로 미처 바다와 면한 샌프란시스코 만의 골든 게이트를 보지못했다.
드레이크 해적이 잠시 머물던 포인트 레이스에 머문 유럽인은 포루투갈 태생이며 스페인에서 항해사 생활을 한 세바스티안 로드리게스 체르메오 (Sebastiao Rodrigues Cermeo: 1560-1602). 체르메오는 마닐라에서 130톤급 산어거스틴 호에 도자기, 비단, 왁스, 향신료 등 동방의 상품을 가득 실었다. 이주민과 병사 80여명의 승객이 승선한 산어거스틴 호는 200톤에 이르렀다. 산어스거스틴 호는 1595년 7월 5일 멕시코 아카폴코 항을 향해 돛을 올렸다. 출항 전 체르메오는 캘리포니아 연안에 마닐라 상선단이 기항할 수있는 항구를 건설할만한 연안을 살피라는 스페인 황실의 특명을 받았다. 산어거스틴 호는 너른 태평양 바다를 건너 오레곤 연안을 지난 후 출항 4개월만인 11월 4일  캘리포니아 연안 세인트 조어지 포인트와 트리니다드 연안에 이르렀다. 얼마후 심한 태풍을 만난 산어거스틴 호는 심한 태풍에 선체 여러곳에 손상을 입었다. 체르메오 선장은 손상된 선체를 손보려 11월 7일 포인트 레이스 부근에 있는 해적 드레이크가 정박했던 드레이크 만에 간신히 배를 대었다. 

상선 수리차 드레이크 만에 정박한 체르메오
산어거스틴이 정박하자 16년전 해적 드레이크를 반겼던 미워크 (Miwok) 원주민들이 외지인을 반겼다. 손상된 산어거스틴을 손보는 사이 어느덧 11월말 경이 되었다. 마침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태풍은 수리중인 산어거스틴호를 강타했다. 산어거스틴의 80여 이주민과 병사들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화물을 안전한 육상으로 대피시켰다. 얼마후 태풍에 강타당한 산어거스틴 호는 깊은 바다속으로 침몰했다. 태풍으로 승객 12명이 목숨을 잃고 일부 귀중한 상품도 분실했다. 체르메오는 산어거스틴이 침몰하자 목적지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를 건조했다. 배를 만드는데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인근 야산에서 벌목하여 필요한 목재를 조달했다. 체르메오는 원주민 미워크 부족들의 협조와 선원과 병사, 그리고 이주 승객들의 협조로 엉성하나마 배를 완성했다. 체르메오는 안전한 곳에 보관했던 비단, 도자기 등 상품을 싣고 12월 8일 오늘의 로스안젤레스 서북쪽에 있는 산부에노 벤츄라로 향했다. 체르메오는 남쪽으로 향하는 빠른 항로를 택해 샌프란시스코 만을 거쳐갈 수있는 기회를 잃었다. 체르메오 일행은 1596년 1월 17일 75마일 거리의 뉴 스페인 차칼라 항구 (Puerto de Chacala)에 도착했다. 역사상 체르메오가 해적 드레이크에 이어 골든게이트 근방 포인트 레이스에 정박했던 2번째 유럽인이 되었다. 그리고 체르메오는 선박의 안전을 기원하며 무사히 연안을 빠져나오라고 산프란시스코 아시 성인께 기도하고 이곳을 샌프란시스코라고 이름지었다.

드레이크 이후 근 200년만에 발견된 골든 게이트 
1602년 체르메오의 사관이었던 세바스티안 비즈카이노가 폭풍우로 침몰한 산어거스틴 호을  찾아 드레이크 만을 찾았다. 그러나 엄청난 겨울 폭풍으로 침몰한 산어거스틴 호를 찾는데 실패했다. 대신 비즈카이노는 이후 몬트레이 만에 잠시 기항한 후 이곳을 천혜의 요새라고 과찬하면서 북아메리카 대륙을 찾는 탐험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몬트레이 만 과찬은 이후 알타캘리포니아의 수도를 몬트레이로 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비즈카이노는 산디에이고, 몬트레이와 산타바아바라같은 지명을 남겼다. 그러나 골든 게이트라는 중요 지점의 이름은 남기지 못했다.
당시 탐험가나 항해사는 거대한 만을 지척에 두고 오늘의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게이트를 보지못했을까. 이는 태평양 바다에서 생겨난  짙은 바다안개도 한몫했지만 알카라츠 (Alcaraz)와 에인젤 (Angel) 섬은 골든 게이트와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골든 게이트와 만의 입구를 식별하기에는 매우 모호했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멀리 떨어진 버클리의 야산에서 골든 게이트를 바라보면 안개에 가려 더욱 모호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항해술도 골든게이트 만과 그 인근 연안을 지나치게 했다. 16세기나 17세기, 바다를 누비던 배는 의외로 작고 거의가 바람에 의존했다. 당시 선장은 육지와 가급적이면 거리를 두고 해안에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배를 보호해야 했다. 태평양 만을 항해하던 항해사들은 바람의 방향에 집중하느라 미처 안개에 가려진 골든게이트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후 150여년간 캘리포니아 탐험은 간간이 계속되었으나 그 어떤 항해사나 탐험가도 골든게이트와 샌프란시스코 만을 발견하지못했다.
1492년부터 1542년까지 뉴스페인 제국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팽창한 스페인 제국의 국경은 향후 2세기간 특별한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제국의 쇠락은 여러 면에서 나타났다. 17세기 초 뉴스페인의 멕시코와 필립핀 간의 교역이 눈에 띄게 줄었다. 태평양을 오가던 배가 줄어들면서 자연 캘리포니아 연안에 세우려던 항구의 필요성도 줄었다. 또한 신천지를 누비던 육상 탐험과 자원개발이 눈에 띄게 줄었다.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건설도 기타 유럽제국에 모범을 보이지못했다. 유럽 제국의 신천지 진출이 주춤하는 사이 새로운 모피 사냥터를 찾던 러시아 제국은 캘리포니아에 눈을 돌렸다.

스페인 제국의 쇠락과 러시아의 신천지 진출
1750년경 유럽의 모피 거래를 독점하던 러시아는 시베리아 지역 사냥감이 급감하자 새로운 모피 사냥터로 알라스카를 비롯한 캐나다와 북미대륙을 지목했다. 러시아 제국은 특히 알타캘리포니아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사냥감을 찾았다. 러시아 제국은 소노마 카운티의 태평양인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러시안 리버’라고 부르면서 본격적으로 정착촌을 마련하고 인근에 포도 농원을 가꾸면서 모피사냥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착촌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어 얼마후 이를 포기했다.
러시아의 이같은 태도를 예의주시하던 스페인 제국은 서둘러 무주공산 격인 알타캘리포니아에 수비대와 정착촌을 마련한 후 여타 유럽제국의 잠입을 차단하기로했다. 1768년 스페인 제국의 촬스 3세는 측근 갈베스 (Jose de Galves)장군을 뉴스페인 총독에게 보내 육상과 해상을 통해 키노 신부에 의해 섬이 아닌 대륙으로 증명된 알타캘리포니아를 식민지화하도록 명령했다. 갈베스 장군은 바하캘리포니아의 교구장인 세라 (Junipero Serra) 신부와 바하캘리포니아 총독겸 군사령관인 포톨라 (Gaspar de Portola)대위에게 캘리포니아 연안을 따라 선교원과 요새를 세워 정착촌을 마련하고 인근 지역을 통치하라고 명령했다. 일차로 갈베스 장군은 까브리요와 비즈키아노가 일찌기 정박한 후 스페인 영토라고 선포한 산디에이고와 몬트레이에 선교원과 요새를 세우고 인근에 정착촌을 마련하기로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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