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사슴 사냥하다 대원이 발견한 ‘샌프란시스코’ 만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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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탐험에서 몬트레이 요새와 선교원 기공
마침 몬트레이 만 인근의 날씨가 유난히 청명한 날, 포톨라는 먼 거리에서 해안을 철석이며 넘나드는 잔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포톨라의 눈에는 옛날 비즈카이노와 선원들이 그토록 극찬하며 서술했던 ‘0’자 모양의 모습과 유사한 지점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토록 찾아헤매던 ‘0’자 모양의 만을 포톨라는 드디어 찾았다. 포톨라는 대원들을 지휘하여 현지를 방문하고 비즈카이노가 서술한 지점과 일치함을 확인했다. 그리고 1603년 비즈카이노와 그 일행이 참나무아래에서 카멜라이트 선교사들과 함께 미사를 올린 것처럼 세라 신부와 크레스피 신부 공동으로 감사미사를 올렸다. 그리고 새로 찾은 만 근처를 스페인 황제의 영토임을 선포했다. 6월 3일 세라 신부와 포톨라 총독은 이곳에 산 카를로스 보로메오 디 카멜(Mission San Carlos Borromeo de Carmel) 선교원 과 몬트레이 요새를 세웠다.
산디에이고와 몬트레이 만에 요새와 선교원을 성공리에 세운 포톨라 총독은 1770년 대위로 진급한 후임 페드로 페이지에게 모든 업무를 인계했다. 찰스 황제는 포톨라를 대령으로 승급시키고 중남미 파나마의 산 브라 (San Blas)제도의 총독에 임명했다. 그는 이후 1776년 뉴스페인의 푸에블라 (Puebla) 주의 총독을 지냈다. 이후 1784년에는 모든 여행경비를 황실에서 차용한 후 스페인으로 돌아가 기병연대의 지휘자를 역임하고 1786년 2월 7일 황실 소유 레이다 궁의 성채 (Lleida)의 경비를 지휘하게 되었다. 포톨라는 그해 70세의 일기로 1786년 10월10일 사망했다. 포톨라는 1770년 6월 알타 캘리포니아를 떠난 후 한번도 알타 캘리포니아를 찾지않았다. 그러나 그가 우연히 발견한 거대한 만은 이후 샌프란시스코라고 불리게 되고 이후 샌프란시스코 항구가 되면서 지상에서 살기좋은 지상 천국으로 발전했다.

항해사 체르메오 샌프란시스코 만으로 명명
골든게이트를 통해 형성된 장대한 만이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을 처음 얻게된 것은 1596년 포르투갈 태생이며 스페인 항해사로 복무한 체르메오 (Sebasiano Rodrigues Soromenho Cermeo (c1560-1602)가 사용하고부터이다. 체르메오는 원주민들의 협조로 인근에서 나무를 베어 간신히 배를 만들어 승객과 화물을 싣고 12월 8일 드레이크 만을 출발하여 산부에나 벤추라로 향했다. 체르메오 선장은 연안 가까이 항해하다 자칫 난파할까 두려워 연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레 배를 몰았다. 그리고 무사히 드레이크 만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아시시의 샌프란시스코 (Saint Sanfrancisco of Asisi) 성인’에게 애절하게 기도했다. 무사히 드레이크 만을 빠져나온 체르메오 선장은 이에 대한 감사로 오늘의 드레이크 만 일대를 샌프란시스코 만 (La Bahia de San Francisco)이라고 불렀다.

1847년부터 샌프란시스코로 부르기 시작
이처럼 어렵사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만이 샌프란시스코라고 정식으로 오늘의 미국인이 부르기 시작한 것은 1847년부터이다. 디 안자의 스페인 황제의 깃발이 처음으로 바닷바람에 펄럭일 때까지 이 일대는 제대로 된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인근에 질 좋은 약초가 풍부하다하여 이곳에 자리잡은 선교원의 사제들은 이곳을 ‘질 좋은 약초가 자라는 곳’인 ‘Yerba Buena’라고 불렀다. 그러나 1846년에서 1848년 2년간 멕시코와 미 합중국간의 전쟁 후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 조약 (Treaty of Guadalupe Hidalgo)으로 알타 캘리포니아가 미국영토가 되자 1847년 초대  에르바 시장 바아트렡 (Washington Bartlet)은 옛 스페인 선장 체르메오가 드레이크 만 연안을 빠져나가며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샌프란시스코 아시시에게 감사기도를 바쳤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샌프란시스코라고 이름지었다.
골든게이트를 통해 내륙 깊숙히 샌프란시스코 만에 기항한 최초의 유럽인은 스페인 탐험가 후앙 아얄라 (Juan de Ayala). 그는 1775년 8월 5일 산카를로스 호를 지휘하여 골든게이트를 통해 엔젤 섬의 오늘의 아얄라 작은 만에 정박했다. 그리고 아얄라는 대원들과 함께 인근 지형 등 정보를 수집했다.
대서양을 통해 태평양에 처음 도착한 발보아 
대서양을 통해 당시 남해 (South Sea)로 알려진 태평양을 육안으로 처음 확인한 유럽인은 스페인 태생 탐험가이며 정복자겸 파나마 정착지 산타마리아 섬의 시장이던 발보아 (Vasco Nuez de Balboa)가 1513년 9월 25일 파나마의 태평양 연안에 도착하고부터이다. 발보아는 1500년 남미 신대륙에 도착하여 탐험끝에 히스파유라 (Hispanula)섬에 정착했다. 그리고 사나운 개를 풀어 원주민을 정복한 발보아는 1510년 오늘의 컬럼비아의 산타 마리아 (Santa Maria la Antigua del Danen) 섬에 유럽인 최초의 정착촌을 세웠다.
1513년 9월 1일 발보아는 선원과 탐험대원 그리고 원주민 안내인 등 모두 190여명의 대원, 그리고 한무리의 사나운 개를 이끌고 쌍돛대 범선과 여러개의 커누를 몰고 파나마 연안을 따라 탐험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후 원주민 추장이 다스리는 부락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처음 대하는 외지인들의 친구가 되고 1천여명의 원주민이 탐험에 합류했다. 1513년 9월 6일 발보아의 대규모 탐험대는 인근 폰카 (Ponca)추장이 다스리는 부족과 충돌했다. 폰카 추장이 항복하고 발보아의 동지가 되자 발보아는 폰카 추장의 원주민 안내로 서쪽으로 진입하여 9월 20일 한치 앞도 보이지않는 밀림지대를 무사히 벗어났다. 발보아 일행은 9월 24일 토레차 (Torecha) 추장이 이끄는 원주민과 일전을 벌여 간단히 이들을 제압했다. 많은 토레차 추장의 전사들이 탐험대에 합류했다.
이후 발보아 탐험대는 오늘의 태평양인 남해 방면인 서쪽으로 전진하여 추쿠난큐 (Chucunanque)강에 이르렀다. 9월 25일 오전 일행 중 한 대원이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서쪽으로 넓게 트인 태평양의 무한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발보아는 정오가 못되어 몇몇 대원들과 함께 햇살에 번뜩이는 남해의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발보아가 대서양에서 사상 처음으로 태평양 연안에 도착한 유럽인이다. 발보아가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이 병사들은 나무껍질을 벗긴 나무기둥에 ‘이곳은 스페인 황제의 영토’라고 칼로 새긴 십자가를 세우는 사이 종군사제 베라 (Andres de Vera) 신부는 정성껏 기도문을 바쳤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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