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사슴 사냥하다 대원이 발견한 '샌프란시스코' 만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바다가 잔잔하여 태평양이라고 부른 마젤란
당시 남해로 불리우던 태평양 너른 바다를 처음 횡단하고 태평양이라고 부른 유럽인은 페르디난트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1480-1521년 4월27일 필립핀 세부 막탄섬에서 사망)이다. 포르투갈 태생 마젤란은 스페인 황실에 고용되어 대서양을 지나 서쪽 항로를 따라 남아메리카를 돌아 향신료의 땅인 동남 아시아의 몰루카 섬으로 향했다. 마젤란은 대서양 연안 산폴리항을 1520년 8월 24일 떠나 10월 21일 마젤란 해협에 이르렀다. 그리고 11월28일 마젤란 해협을 빠져나왔다. 험하기로 유명한 마젤란 해협 (*마젤란 해협: 칠레 남단부와 티에라 델 푸에고 (Tiera del Fuego) 사이에 있는 해협. 파나마 운하가 개통전에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해협으로 사용. 드레이크 해협보다 낮지만 폭이 좁고 물살이 거칠어 무척 위험한 해협이다. 1520년 마젤란이 처음 이용하여 마젤란 해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을 지나 1520년 11월 낯선 바다에 들어섰다. 거친 마젤란 해협에 비해 의외로 잔잔한 바다를 만난 마젤란은 이 바다를 평화스럽다는 의미의 태평양이라고 불렀다. 마젤란의 상선단은 1521년 3월28일 괌섬에 도착하고 다시 108일간의 태평양 횡단 끝에 1521년 4월 필립핀의 세부 섬에 도착했다. 마젤란과 동료선원들은 향신료의 땅 몰루카 섬은 지척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몰루카 섬은 수천 마일 밖이었다.
출항시 270명의 선원중 18명만이 귀항
그러나 실제 태평양을 횡단한 상선은 3척뿐으로 이후 출항시 270명의 선원 중 18명의 선원만이 빅토리아 호에 향신료를 싣고 1522년 9월 6일 떠났던 산 루카 항에 돌아왔다. 귀항중 원주민 3명이 동승을 요청해 모두 21명이 루카 항에 귀항했다. 출항할 때 5척의 상선단 중 1520년 4월 2일 스페인 출신 선장들이 주동이 되어 선상 반란을 일으켜 빅토리아호의 선장 멘도사가 사망하고 케사다는 재판끝에 처형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한 1520년 5월 22일에는 산티아고 호가 침몰한데 이어 1520년 11월 8일에는 불만에 쌓인 산안토니오의 선장과 선원들이 몰래 일행을 이탈한 후 스페인으로 도망쳤다.
마젤란은 1520년 11월 28일 파도와 폭풍으로 거친 마젤란 해협을 통해 태평양에 들어섰다. 그러나 의외로 태평양 바다는 잔잔했다. 이에 감격한 마젤란은 이 너른 바다를 태평양이라고 이름지었다. 마젤란의 선단은 굶주림, 갈증, 괴혈병에 시달리며 1521년 3월 28일 괌섬에 기항하고 이어 1521년 4월 필립핀 세부섬에 도착했다. 세부섬의 원주민들은 의외로 낯선 외지인에게 호의적이었다. 추장 주아나는 일족과 부족 800여명과 함께 마젤란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여 필립핀 최초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마젤란은 1521년 4월27일 세부섬 근방 막탄 섬을 방문했다.
마젤란, 세부인근 섬 추장과 언쟁 후 전투 중 사망
마젤란은 추장 라푸라푸아와 부족민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대리자 스페인 황제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막탄섬의 추장과 부족들은 스페인 황제에게 복종할 것을 거부하면서 마젤란과 그의 부하들과 부족간에는 싸움이 벌어졌다. 숫적으로 절대 열세인 마젤란은 동행한 선원들에게 상선으로 돌아가 소총과 대포를 가져와 적에게 대항하자고 소리쳤다. 그러나 겁에 질린 선원들은 대포를 가져오라는 이야기는 듣지못하고 배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홀로 많은 원주민 전사를 상대하던 마젤란은 41세의 나이로 막탄섬에서 숨을 거두웠다.
마젤란의 뜻밖의 사망으로 상선단은 서둘러 세부 섬을 떠나 몰루카섬에서 목표인 향신료를 구한 후 귀국키로 했다. 그러나 상선 3척을 운행하자면 배를 모는 선원이 부족했다. 부득이 콘셉시온 호는 자침시키고 빅토리아 호와 트리니다드 호 2척의 상선만 운행하기로했다. 그러나 욕심이 과한 선원들은 몰루카 섬에서 향신료를 과적하는 바람에 트리니다드 호는 누수가 생겼다. 부득이 몇몇 선원은 현지에 남아 누수부분을 수리하고 귀국하기로하고 빅토리아 호의 선장 세바스티안 엘카모네와 피카페타를 포함 18명만이 몰루카 섬을 떠났다. 빅토리아 호는 항해중 동승을 요청한 원주민 3명등 21명이 1522년 9월6일 떠났던 스페인 산루카 항에 닻을 내렸다. 한편 과적에 의한 누수로 현지에 남아있던 트리니다드 호는 4개월만에 보수를 끝내고 스페인으로 출항했다. 그러나 항해중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된 트리니다드 호는 포르투갈에 3년간 억류되었다가 간신히 4명의 선원만이 스페인에 돌아왔다.
로키산맥 넘어 대서부를 탐험하고 태평양에 도착하다
미합중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동부지역을 제외한 너른 대륙은 대부분이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특히 험준한 로키산맥 서쪽에 자리한 대평원은 유럽인들이 발을 디딜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다. 그러나 1801년 취임한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유난히 영토 확장에 욕심을 부렸다. 당시 미합중국 측은 서부 대륙에 대해서는 전혀 정보가 없었다. 이들은 일찌기 미 대륙에 진출한 프랑스 상인이나 모피상들, 아니면 스페인이나 영국의 탐험가로부터 귀동냥하는 것이 전부였다. 미화 1500만달러로 프랑스 제1공화국으로부터 루이지애너 주를 사들인 제3대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너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가 미시시피강을 넘어 로키산맥까지 이른 영토를 측량키로했다. 합중국 육군 메리웨더 루이스 (Meriwether Lewis) 대위와 윌리암 클라크 (William Clark)는 45명으로 구성한 측량대 겸 탐험대를 지휘하여 1804년 5월 14일 미주리 세인트 루이스를 떠나 미주리 강을 커누로 건넌 후 오늘의 노스 다코다에 해당하는 인디안 영토 맨던 요새에서 겨을을 났다. 탐험대 겸 측량대는 미주리 강을 지나 로키산객을 넘어 워싱톤 주와 오레곤의 경계인 콜럼비아 강 하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1805년 11월 15일 태평양 연안에 도착한 후 무한한 태평양의 수평선을 보았다. 그리고 탐험대는 미개척 서부 대평원에 대한 값비싼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탐험대는 2년 반동안 70 여개 원주민 마을의 부족과 접촉하고 140여장의 지도를 작성했다. 200여종의 동식물을 새로 기재했다. 그리고 모두 6,000여 마일을 이동했다.
임신한 몸으로 통역겸 안내인으로 나서다
특히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에는 이색적인 원주민 통역의 공이 컸다. 원주민 여인 사쿠주위어 (Sacagawea: 발음 기호 sa-kuh-juh wee-uh)는 본래 쇼션 (Shoshon)부족이었다. 그녀는 1862년경 아이다 호의 렘히 (Lemhi)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00년 들소사냥나온 히다트사 (Hidatsa) 부족에게 생포되었다. 마침 그녀는 노름빚으로 프랑스의 캐나다 모피 사냥꾼 샤르보너(Toussaint Charrbonneau)의 소유가 되었다. 샤르보너가 탐험대에 원주민 통역으로 고용되었을 무렵 그녀는 마침 임신중이었다. 쇼션 부족 언어와 히다트사 언어가 가능한 그녀는 마침내 탐험대에 통역으로 고용되어 남편과 함께 탐험대를 따르게 되었다. 그녀는 유창한 통역으로 탐험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2년 반만에 세인트 루이스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아들은 이미 2살이 넘었다. 2005년 빌 클린튼 대통령은 그녀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를 미 육군 명예하사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녀와 탐험중 태어난 아들을 새긴 기념금화를 만들었다.
골든 게이트 해협은 샌프란시스코 만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해협이다. 샌프란시스코 반도와 마린 (Marine)의 3면이 바닷물로 둘러싸인 곶사이 해협의 너비는 약 1마일. 수심은 115미터. 1937년 이 해협을 연결하는 금문교가 준공되었다.
이 해협을 골든게이트라고 이름 지은 프리몬 (John C. Fremont)은 엔지니어 겸 탐험가, 과학자인 미국 육군장교. 프리먼이 이스탄블 항구의 골든 폰 (Golden Horn)을 연상하고 태평양 바다를 통해 동양에서 부유한 화물이 많이 입항한다고 상상하고 골든게이트라는 이름을 1848년 미국 상원에 제출한 ‘지리학적인 회상록’에서 사용하면서 널리 일반인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본 칼럼은 이번 호로 샌프란시스코 만의 발견을 마무리하고 작가의 집필 일정상 잠시 쉬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