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아리조나’지명을 전 미국에 알린 ‘디 안자’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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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원주민 
1751년 인근 피마부족들이 연합하여 스페인 정착촌과 선교원을 대상으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산타 크루즈 강 주변 피마부족들의 마을에 선교원을 중심으로 스페인 정착촌이 형성되면서 이주한 정착민을 통해 천연두, 홍역같은 유럽의 전염병이 전파되었다. 투마카코리의 경우 200여명이던 주민은 천연두 감염으로 30여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인근 원주민의 약 95%가 희생되었다.
피마족은 본래 오담 (O’odham)부족의 본거지인 멕시코 북부 소노라 지역의 피멜리아 알타 또는 어퍼  피마지역인 산타크루즈 강이나 알타 강 유역과 남부 아리조나 지역에서 농사를 짖고 살았다. 이들은 아리바카, 구에바비, 사릭 지역에 부락을 이루고 농사를 주업으로 생활했다.

피마는 “나는 모른다”는 뜻
언젠가 피마인들 거주지에 스페인 사람들이 나타났다. 스페인의 정착민이나 상인들은 원주민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면 질문을 알아들을 수 없는 원주민들은 반복해서 “ani pi” 또는 “ani mac” “‘pi mac”을 외쳤다. 이는 원주민 말로 “나는 모른다”는 뜻. 스페인들은 이말을 줄여 외쳐대는 원주민을 ‘피마’인이라고 부르면서 강변에 거주하는 원주민을 피마인이라고 불렀다. 
피마인들의 정착지인 산타 크루즈 강변 주위에 키노 신부가 1691년 처음 선교원이 세워지면서 원주민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선교원과 선교원이 전달하는 신문명의 생활도구나 소나 돼지 그리고 양, 염소같은 유럽산 가축, 밀, 보리, 콩같은 농작물을 고마워하면서 친근감을 표했다. 당시 북미 원주민들이 사육하는 동물은 고작 개뿐이었다. 생활도구라고는 나무가지이거나 짐승 가죽제품, 그리고 손으로 만든 바구니, 그물, 사슴뿔정도였다. 그리고 거처는 땅을 1미터 정도 판 웅덩이에 갈대나 나무가지를 덮고 진흙을 얹거나 짐승 가죽으로 하늘을 가렸다. 그리고 사계절 맨 몸에 풀이나 무두질한 가죽으로 주요부위를 가렸다. 일부 해안가 원주민들은 나무통을 파낸 커누를 타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이처럼 원시생활하던 피마인들의 생활은 선교원 측이 제공한 서구의 생활을 받아들여 크게 개선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원주민들은 점차 선교원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선교원 측은 원주민들의 전통신앙을 맹목적으로 부정하고 원주민 마을에 종탑이 우뚝 선 선교원을 신축하며 원주민들을 무보수로 강제동원했다. 또한 유럽인들을 통해 전염병이 창궐하자 급기야 원주민 분노는 집단 반란으로 이어졌다.

전염병에 95%주민이 사망하자 반란으로 보복
원주민 집단항쟁은 아주 우연한 사고로 전 피마지역에 퍼져갔다. 1690년 경 한 떼의 스페인 병사들이 최근 도난당한 말을 찾아 원주민 마을에 들어섰다. 마침 마을 입구에는 여러명의 원주민들이 모여 막 도살한 고기를 불에 굽고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스페인 병사들은 ‘이들이 말도둑으로 도둑질한 말을 잡아 말리는 중’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몇몇 원주민을 결박하려했다. 이 소동으로 양측간에는 치고 받는 몸싸움이 일었다. 3명의 원주민이 사망하고 2명은 결박당했다. 그리고 스페인 병사들은 마을안으로 몰려들면서 몸을 숨기려는 여인들을 강제로 추행하면서 양측간 소동은 겉잡을 수없이 번졌다. 이후 원주민들이 말리던 고기는 말고기가 아닌 사냥해온 사슴고기로 밝혀졌다.
이같은 소식은 순간 전 피마부족 마을에 번졌다. 그리고 성난 피마 부족들은 선교원과 스페인 정착촌을 무차별 공격했다. 투마카코리에 처음 선교원을 세운 키노 신부가 양측간 중재에 나섰다. 1695년 알타 강 스페인 주둔군 요새에 50여명의 원주민이 찾았다. 이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중립적인 원주민들로 반란군의 정보를 전해주려 모여들었다. 그러나 많은 원주민이 모여들자 스페인 기마병은 이들을 둥글게 원을 그리며 둘러쌌다. 갑자기 기마병이 탄 말이 앞발을 들어올리고 발버둥을 치자 놀란 원주민들이 동요했다. 이같은 사소한 소동은 급기야 양측간에 난투극으로 발전하여 근 48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는 참사로 번졌다. 이 소식은 전 피마부족들에게 퍼지면서 이들의 저항은 불꽃처럼 번졌다.

반란병과 결전하려 출전한 우레아 민병대장
피마부족의 반란이 점차 확산되자 오포데피 마을의 민병대장 베르나르도 디 우레아는 민병대원을 이끌고 몸소 반항하는 피마족과 결전을 앞두고 진압군에 참전했다. 1751년 12월30일 우레아는 대원 24명을 이끌고 피마 부족과 결전을 벌일 아리바카 (Arivaca)를 향해 피멜리아 알타의 산이그나시오 마을을 떠났다. 총독의 특별사절로 원주민 이그나시오 바투비페 (Ignacio Batubipe), 이그나시오 (Ignacio), 그리고 산타 막다레나에서 온 니콜라스 (Niolas) 등 3인이 동행했다. 이들은 차후 스페인 황제의 뜻을 피마부족 반란군에게 전달하여 양측간에 화해를 이루려 온 사절이다. 출정 당일 일행은 밤9시경 포트레로 델  투푸 (Portrero del Tupu)에 여장을 풀고 야영했다. 다음날 일행은 소대를 분산하여 반군들의 흔적을 쫒아 엘아구아제 (El Aguaje)에 이르러 소대를 다시 꾸렸다. 다시 투부타마에 이르러 나눈 두 그룹은 반란군 흔적을 발견하고 뒤 쫒아 체로 프리토 (Cerro Priewto)에 도착한 후 야영했다. 1752년 1월1일 일행은 다시 진군하여 사릭 (Saric)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죽어 넘어진 4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정성스레 매장해주었다. 그러나 마을 근처 성당부근에 널려있는 시체 2구는 단단한 땅을 팔 아무런 도구를 구할 수 없어 인근 묘지 안으로 운구하고 공동묘지의 문을 닫았다. 우레아의 대원들은 반란군의 방화로 타버리거나 무너져내린 지붕 근처에 딩구는 시체를 보며 그날밤 투쿠바비아 (Tucubavia)에서 밤을 보냈다.

새벽녘 산을 내려와 공격하는 반란군
그리고 다음 우레아의 병사들은 2일 정규군이 피마 인디안과 결전을 준비중인 아리바카에 도착했다. 우레아는 그곳에서 정규군 중위 돈 조세프 폰테스 (Don Joseph Fontes)와 돈 안토니오 올귄 (Don Antonio Olguin)을 만나 총독의 친서를 전달헸다.
이후 진압군은 서둘러  반란군과 결전을 치를 준비를 했다. 총독의 사절 이구나시오 바투비페가 협상차 반란군 진영을 찾았다. 그날 밤 11시경 바투비페는 비밀리 잠복시켰던 진압군의 첩자 야퀴이 인디안 조아친 (Joachin)과 함께 돌아왔다. 조아친은 적군 대장 돈 루이스는 새벽 미명에 전 반란군을 이끌고 진압군을 치러 산에서 내려온다고 했다. 또한 그는 함께 산에 오른 나머지 2명의 사절중 이그나시오를  곤봉으로 머리를 쳐 살해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반란군 진영에 있으나 아직 살아있다고 전했다. 조아친은 미명을 타고 비밀리에 바투비페와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진압군은 이어 탈주한 첩자의 진술에 따라 즉시 방어망을 갖추었다. 병사들은 주둔지 근방에 긴 참호를 파고 반란군의 접근을 막기위해 여러 곳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기병대는 즉시 적들과  더욱 가까이 진전시키고  23명의 잔여 병사는 말에 태운 채 대기시켰다.
서서히 어둠이 가셨다. 1월 5일 날이 밝자 반란군 수괴 돈 루이스는  2천여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산등성이를 타고 진압군측에 몰려왔다. 오합지졸같은 반란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스페인 기마병과 방어군의 적이 될 수 없었다. 무리를 지어 산에서 내려온 오합지졸 반란군은 얼마 후 43구의 전사자를 버려둔 채 일제히 산정상으로 퇴각했다. 진압군은 생명을 애걸하는 포로는 살려주었다. 그들의 무기를 해제시키고 요란한 머리깃털 장식도 거두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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