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 안자 아리조나 목장에 머물며 사건 처리
현장에 도착한 디 안자는 우레아의 목장에 머물면서 이러한 문제를 멕시코의 총독 관저와 수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정리했다. 그리고 디 안자는 발신지와 수신처를 아리조나의 우레아 목장으로 표기한 후 편지를 주고받아 아리조나라는 지명을 멕시코를 비롯한 전 미국에 알렸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바스크 부족들이 많이 정착했다. 바스크 부족들은 좋은 참나무를 ”Haritz ona”라고 불렀다. 이 말이 변하여 아리조나가 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러나 아리조나라는 지명은 아리조나 주가 뉴 멕시코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영토가 될 때 몇가지 후보이름 중 링컨대통령이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아리조나의 은광문제를 해결한 디 안자는 서둘러 프론테라스의 요새내 관저로 돌아가 가족들과 얼마간의 휴식을 취했다. 당시 뉴스페인 당국과 황실은 서둘러 알타캘리포니아에 스페인 정착지를 마련하여 이 지역을 손에 넣으려했다. 미주리 주 센트루이스에서 출발한 몰몬교도들의 도로가 개설되기 전, 험준한 로키산맥으로 거대한 미 대륙은 동부와 중부에서 서부로 철저히 나누어졌다. 중, 동부 주민들의 서부진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담대한 모피나 비버 사냥꾼만이 원주민의 도움으로 간간히 로키 산맥을 넘어 서부로 진출하기도 했다. 그것도 1800년대 초부터이다. 키노 신부조차 치와와 사막지대를 피해 바하캘리포니아와 경계한 캘리포니아 만 서부지역인 시나로아 지역을 선교대상으로 삼았다. 1700년대 초 개스퍼 포톨라가 캘리포니아 만을 발견한 이래 함께 동행했던 세라 신부는 이후 몬트레이 만에서 산디에이고 사이에 산루이스 오비스포 같은 선교원 등 8개의 선교원을 세웠다. 샌프란시스코 만이 발견되고 또 바람같은 세월이 흘렀다. 근 40여년이 흐르는 사이 누구도 미지의 땅 샌프란시스코 만을 찾는 개척자는 나오지 않았다.
디 안자 탐험대 보급로 정찰에 나서다
일찌기 알타캘리포니아 개척을 꿈꾸던 디 안자는 알타캘리포니아의 탐험대나 정착민을 위한 보급로 확보에 나섰다. 어렵사리 당시 뉴스페인 총독 디 비자론 (Juan Antonio de Vizarron y Eguiarreta)의 탐험 허가를 받은 디 안자는 20여명의 기병대를 지휘하여 너른 훈련장을 나섰다. 26년 후인 1776년 샌프란시스코 만에 스페인 황제의 깃발을 올린 디 안자 2세가 만 4살이 채 안된 어린 몸으로 어머니 마리아 니토와 함께 떠나는 아버지를 전송했다.
1740년 5월 초의 프론테라스 초목은 싱그러웠다. 디 안자는 만약 알타캘리포니아를 탐험하거나 정착민이 찾을 경우 이들을 위한 안전한 보급로 확보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캘리포니아로 통하는 소노라의 산타크루즈 강 근방 수암카 (Suamca)에서 구에바비 (Guevavi), 투마카코리(Tumacacorl), 산 하비에르 델 박 (San Xavier del Bac)사이의 보급로 확보를 위해 20여명의 기마병을 지휘하여 정찰에 나섰다. 당시 일대에는 아파치들의 횡포가 빈번했다. 디 안자가 정찰할 투마카코리 일대는 프론테라스 요새로부터 근 160마일 거리. 디 안자는 수암카, 구에바비, 투마카코리와 산하비에르 델 박 일대를 조심스레 정탐하고 1740년 5월 9일 요새로 귀가 중이었다.
유유히 흐르는 산타크루즈의 강내음이 5월의 바람을 타고 코 끝을 스쳤다. 멀리 보이는 프론테라스의 하늘 끝은 황홀한 저녁놀이 붉게 타오르고있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가 중인 디 안자와 대원들은 평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대원들도 귀가한다는 평안한 마음으로 디 안자 사령관에 앞서 조금 거리를 두고 말을 몰았다. 디 안자가 나무숲이 무성한 산길로 들어섰을 무렵 이미 앞서간 대원들은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정찰 후 귀대중 아파치 습격으로 전사한 디 안자
디 안자가 얼마쯤 숲길로 들어섰을 무렵 숲속에서 몇 명의 아파치들이 뭉툭한 몽둥이를 흔들며 나타났다. 순간 날아든 화살이 디 안자 사령관의 투구아래 목주위에 날아들었다. 연달아 몇 발의 화살이 사령관의 목주위로 날아왔다. 디 안자 사령관은 순간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렀다. 이때 전신에 형형색색 물감으로 전신을 그린 아파치들이 디 안자의 죽음을 확인한 후 뭉툭한 몽둥이를 흔들고 괴성을 지르며 바람처럼 숲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령관 디 안자보다 앞섰던 병사들은 한참을 가도 사령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서둘러 지나온 길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목에 화살을 맞고 머리를 두른 투구는 반쯤 벗겨진 채 누워있는 처참한 모습의 죽어있는 사령관을 보았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사령관을 살해한 사나운 아파치들은 서둘러 나무 숲으로 사라진 후였다. 당시 디 안자 사령관의 나이는 47세. 유족으로는 미망인인 마리아 로사와 3남3녀의 유자녀. 장남 프란시스코 안토니오는 당시 15살, 차남 호세파는 8살.
디 안자 1세가 사망한 지 26년 후 아버지 디 안자 1세의 유지를 받들어 알타캘리포니아 개척의 꿈을 실현한 디 안자 2세는 사망 당시 만 4살도 못되었다.
이후 투박수비대 대장 디 안자 2세는 1776년 샌프란시스코 만에 스페인 정착촌과 수비대, 선교원을 세우고 캘리포니아를 스페인 영토로 자리매김하는 공을 세웠다.
디 안자 사후 26년 후 아들이 유지를 실현하다
아피치들의 습격으로 사망한 디 안자의 유해는 인근 수암카 선교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수암카 선교원의 예수회 소속 켈러 (Keller) 신부의 주재로 영결미사를 올렸다. 그의 유해는 수암카 선교원의 공동묘지나 테레나테 (현 툼스톤)에 안치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매장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디 안자 1세가 아파치들의 습격으로 전사했다는 소식은 소노라와 알타 피멜리아 일대 그리고 멀리 치와와 지역까지 불길처럼 퍼졌다. 100여마일 거리의 치와아 지역의 야노스 수비대 대장 호세 디아즈 델 가르피오 사령관은 기마병 1개 분대를 지휘하여 사건현장으로 바람처럼 달려왔다. 디 안자 1세의 장인 후임으로 사령관이 된 까르피오는 인근 아파치들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13명을 처형했다.
갑작스레 디안자 1세가 전사한 소노라 일대의 유지와 가까운 친척들이 유가족들은 도왔다. 특히 야노스에 사는 마리아 로사의 오빠 3명은 마리아 로사를 적극 도왔다. 그리고 구에바비에 사는 마리아 로사의 이모 디 살바와 디 안자와 평소 교류가 잦던 이모부 마뉴엘 디 소사는 유가족을 적극 후원했다. 디 안자가 추진했던 알타캘리포니아 개척은 장기간 중단되었다. 그리고 인근 테레나테 (툼스톤)에는 1,775년 테레나테 수비대가 들어섰다.

